[편집국에서] '뇌송송 구멍 탁' 괴담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
10년이 흘렀다. 2007년 4월2일 새벽 1시, 8일째 협상장인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 로비를 지키던 기자에게 “끝났다”는 말이 전해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개시 선언 14개월 만에 그렇게 타결됐다. 참 험난한 과정이었다. 2006년 6월 워싱턴 1차 협상 때부터 농산물, 의약품, 서비스 개방 등 수많은 이슈가 터져나왔다. ‘한·미 FTA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소속 100여명은 미국까지 쫓아와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에 드러누웠다.

5차 협상은 듣도 보도 못한 몬태나주에서 열렸다. 시애틀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보즈먼에 내려 버스로 2시간을 이동해 해발 3200m의 협상장, 빅스카이 리조트에 도착했다. 끝없는 평지 가운데 깎아지른 듯 치솟은 3000m대 바위산들의 모습에 살짝 무섭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깡촌’ 몬태나까지 간 건 한국을 휩쓸던 광우병 시위 때문이었다. ‘뇌 송송, 구멍 탁(뇌가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린다)’이란 괴담 탓에 젊은 엄마들까지 유모차를 몰고 나와 소고기 개방 반대를 외쳤다. 당시 미국 상원의 실세였던 몬태나 출신 맥스 보커스 재무위원장은 ‘미국 소가 얼마나 건강한지 보여주겠다’며 협상단을 몬태나로 끌어들였다.

우리 협상팀을 가장 괴롭힌 건 상대방이 아니었다. 온갖 괴담과 시위였다. 반대 세력은 소고기 수입, 투자자국가소송(ISD) 수용, 교육·의료 개방 등으로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었다. 감기약은 10만원, 맹장수술비는 900만원으로 치솟는다는 주장이 사실처럼 떠돌았다. 야당에 의해 협상 비밀문서가 유출되기도 했다.

한·미 FTA는 올해 타결 10년, 발효 5년을 맞았다. 백년대계를 보고 맺은 협정인 만큼 공과를 논하긴 이르다. 하지만 주변에 광우병 환자는 없고, 의료·교육 시장도 점령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협상을 주장하는 등 미국 쪽에서 불만이 나온다. 물론 농업 등 한국에도 피해를 본 산업이 있다. 하지만 양국이 조금씩 양보해 더 많은 부를 창출하자는 취지였음을 감안하면 괜찮은 협상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사석에서 만난 협상단 고위관계자는 “협상에서 정확히 균형을 맞추기 어려우며, 억지로 맞춰도 미래에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시스템을 미국 수준에 맞춰 발전시키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각종 보조금, 스크린쿼터 등 시효가 지난 국내 법·제도를 내부 개혁하려면 반대도 많고 시간도 걸리니 한·미 FTA를 통해 한 번에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얘기였다. 또 대(對)중국 관계에서 미국을 버팀목 삼아 균형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중국이 하고 있는 짓을 보면 한·미 FTA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괴담은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도 수많은 괴담과 거짓 주장이 소셜미디어를 뒤덮고 있다. 대선에 출마한 정치인들도 100년 뒤 우리의 지향점과 향후 5년간 무엇을 할지를 밝히기보다 경쟁자의 말실수를 괴담으로 만들어 퍼뜨린다. 한·미 FTA 협상과 발효란 거대한 소용돌이를 뚫고 나왔지만, 우리 의식은 많은 진전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김현석 산업부 차장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