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감사인 지정제'는 옥상옥이다
연이은 회계부정 사건으로 한국의 회계투명성 제고를 위한 근본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재무제표 작성자인 기업인으로서 많은 반성과 책임을 느끼는 동시에 투명한 회계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정부와 국회의 노력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제도개선 과정에서 감사보수 감사투입시간이 증가한다거나, 내부통제 인증수준 강화에 따라 업무 부담이 늘어나는 등 기업에 불편함이 발생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기업이 감수해야 할 비용이며 이런 비용은 결국 기업가치 상승이라는 편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점을 기업들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와 국회 모두 회계투명성 제고를 위한 핵심 대책으로 ‘감사인 지정제 확대’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업 우려가 적지 않다. 국회는 상장회사 전면 지정제를, 정부는 대형 상장회사 및 금융회사에 대한 선택지정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데 회사의 감사인 선임권한을 배제하겠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회계부정은 국가나 시대를 불문하고 있어 왔다. 미국의 엔론, 월드컴, 영국의 폴리펙, 독일의 콤로드, 프랑스의 크레디리요네 사례부터 가깝게는 일본에서의 2011년 올림푸스, 2015년 도시바 및 캐나다의 밸리언트 사례까지 기업들의 분식회계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가 내린 분식회계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우리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미국은 엔론 사태 이후 ‘기업회계 개혁법’을 제정해 관련 규정을 위반한 경영진의 상여금을 몰수하고 자격을 영구히 박탈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기업 책임을 강화했다. 또 내부 회계관리제도를 도입하고 외부감사인의 비감사용역을 제한하는 동시에 회계정보 공시 강화, 내부고발자 보호제도 강화 등 기업과 감사인의 책임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한 바 있다. 다른 나라의 사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어느 나라도 회계부정의 대책으로 정부가 기업의 감사인 선임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정책을 채택한 사례는 없다. 그들이라고 왜 감사인의 독립성 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또 왜 지정제 도입을 검토해 보지 않았겠는가. 모든 회사가 틈만 나면 분식회계 기회를 노리고 감사인에게 ‘갑질’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정상적인 회사들은 자기 회사의 비즈니스를 충분히 이해하고 풍부한 경험에 기반해 혹시라도 회사가 놓칠 수 있는 점을 지적해 주는 능력 있는 감사인과의 계약을 희망한다. 지정제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 줄 감사인을 선택하고자 하는 기업의 선의를 제약하는, 시장논리에 반하는 조치이며 감사의 전문성 및 감사품질 저하, 국제신뢰도 하락이라는 실패가 예견되는 단기처방이다.

분식회계를 적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내부고발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공모에 가담한 사람이나 공모사실을 알게 된 내부자가 그 사실을 감독기관에 알리는 것이고 고발자가 절대로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획기적인 포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분식회계에 따른 비용이 편익을 현저히 초과하도록 관련 형사처벌을 엄중하게 마련하고 분식회계 전력이 있는 자는 재취업을 금지해야 한다. 또 독립감리기구를 신설하고 감리주기를 단축해 분식회계는 반드시 적발된다는 신호를 시장에 전달해야 한다. 이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회계부정에 대한 올바른 처방이다.

감사인이 호소하는 갑을관계의 어려움은 감사인의 지위를 강화하는 다른 제도적 정비로 대처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지정제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정부가 이미 충분한 대책을 마련한 이상 이에 지정제를 더하는 것은 옥상옥(屋上屋)이다. 기업이 스스로 감사인을 선택할 수 없는 낯부끄러운 상황이 현실이 될까 우려스럽다.

정구용 <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