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노동할 권리는 청구권 아닌 자유권이다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아름다운 말은 나치 때문에 더럽혀졌다. 노동을 자유의 조건으로 규정한 이 놀라운 문장은 실은 1873년 독일의 로렌츠 디펜바흐라는 소설가가 노름으로 살아가는 게으른 자들이 진정한 노동을 깨달아간다는 내용으로 쓴 소설 제목이었다고 한다. 독일 정신이 웅비하던 이 시기야말로 부지런한 노동과 단련된 근육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시기였다. 맨손체조가 생겨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나치 강제수용소 입구마다 이 문장을 을씨년스럽게 내걸면서 노동은 노예노동, 강제노동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원래 중세 기독교는 노동하는 삶을, (천시까지는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저급한 인간 활동으로 평가했다.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된 원죄 지은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노동은 굴종이요, 부자유요, 본질적으로 강제된 노동일 수밖에 없었다. 땀흘리는 노동이 아닌 관조하는 삶을 가장 우월한 삶으로 본 것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중세적 철학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는 시가도 그렇다. 빨리 일어나 밭에 나가라고 호통치는 화자는 유한계급이요, 호통을 듣는 자는 농민이거나 머슴이다. 이런 계급 제도에서는 노동이 천시될 수밖에 없다.

루터가 놀고먹는 수도원을 먼저 공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노동에는 귀천이 없고, 신의 소명이며,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루터의 주장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근대화의 언어였다. ‘끊임없는 노동’을 강조했던 청교도의 직업윤리는 근면 검박과 더불어 금욕적 노동이라는 칼뱅주의를 만들어 냈다. 막스 베버가 기독교 정신이라고 말했을 때의 기독교 정신은 바로 이 근면 검박한 정신이었던 것이다. 착취가 존재하는 곳에서 자유노동은 온전하기 어렵다. 자유가 없는 노동은 천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만 할 때 종종 “신성하다”는 단어를 붙이게 된다. 신성한 국방 의무, 신성한 납세 의무라고 말해야 그것의 반자유주의적 속성이 은폐된다.

노동에 대해서도 우리는 종종 신성하다는 수식어를 붙여서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노동(정확히는 근로)을 자유권이 아니라 일종의 청구권적 권리로 정하고(헌법 제32조제1항), 동시에 의무라고도 규정하고(헌법 제32조제2항) 있다. 이 둘 다 잘못된 것이다. 노동을 정부가 보장해주어야 하는 호구지책의 고용으로 인식하거나,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제공해야 하는 의무라고 해석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참한가. 아니 이 나라에는 게으를 자유조차 없다는 것인가?

언론 자유를 선언한 역사적 문서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ka, 1644)를 썼던 존 밀턴은 “신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고용주”라는 말도 했다. 노동에 대한 역사적 레토릭이다. 강제된 노동이 아니라야 그 노동에서 소유권이 발생하게 된다. 소유권이 성립하려면 자연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이 그것에 가해져 무언가가 생산돼야 한다. 이는 존 로크가 가르친 그대로다. 노동은 자유의 원천이며, 소유권의 뿌리이며, 인간성의 본질에 속한 활동이다.

지난주 대한민국 국회는 4개 정당 공동으로 누구라도 ‘52시간을 초과해 노동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누가 몇 시간을 일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누가 열심히 일할지, 누가 게으름을 부릴지를 자신이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자유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자유노동은 역사 속에서 종종 강제노동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중국 문화혁명은 하방이라는 것을 통해 강제노동을 실시했고, 북한은 혁명화라는 이름으로 강제노동을 인간 교화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히틀러의 극우나 스탈린의 극좌는 언제나 이렇게 비슷하게 논다. 무엇에든 평균의 논리를 갖다 대면 반자유가 되고 만다. 연간 2113시간이라는 OECD 최장 노동시간 평균치는 허구의 숫자에 불과하다. 불완전 고용이 많아지면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이런 허무한 통계를 입법 자료로 삼는 것부터가 바보들의 짓이다. 강성 노조의 독점이 존재하는 비자유 노동시장에서의 웃기는 시도들이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