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 대해 알아보는 JTBC의 예능 ‘잡스’.
직업에 대해 알아보는 JTBC의 예능 ‘잡스’.
직장은 있어도  직업은 없는 사회…'업의 본질'을 되묻다
자아를 찾는 ‘아이덴티티 워크숍’, 자신만의 장점에 맞는 일을 살펴보는 ‘강점 혁명 워크숍’,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퇴사포럼’…. 지난해 5월 문을 연 ‘퇴사학교’의 수업 내용이다. 삼성전자를 다니다 그만둔 장수한 씨가 학교를 열었다. 개교 1년도 안 됐지만 3000여명의 직장인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가 쓴 책 《퇴사학교》도 서점가에서 화제가 됐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름과 강의의 주된 내용이 다르다. 퇴사학교지만 오히려 ‘일’에 대해 말한다. 퇴사를 화두로 무기력해진 직장인들에게 일의 의미를 되묻는다. 그래서 퇴사학교 앞엔 이런 타이틀이 붙는다. ‘꿈을 찾는 어른들의 학교.’

방송가에서도 일의 의미를 찾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다. JTBC의 ‘잡스’, EBS의 ‘잡쇼’에선 직업별 전문가들을 불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듣는다. 예능 ‘잡스’에선 이런 질문이 쏟아진다. “공채 시험이 있나요.” “필수 자질은 무엇인가요.” 언뜻 보면 일반 기업의 채용박람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야구해설가, 국회의원 등을 향한다. 채용박람회 등에서 ‘직장’에 대한 질문만을 하던 이들이 방송을 통해 평소 관심이 많았던 ‘직업’ 자체에 대해 묻는다.

직장만 있고 직업은 사라진 사회에서 콘텐츠가 다시 일의 본질을 묻고 있다. 직업에 대한 고민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기계처럼 이력서를 넣기 바쁘고, 어렵게 입사해도 곧 자괴감에 빠진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 그저 직장을 찾은 데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구직자들, 직업의식보다 월급을 위해 출근하는 직장인들. 그럴수록 진정한 업(業)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져만 간다. 콘텐츠는 이런 대중의 잠재심리를 파고들며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고(故) 신해철의 노래 제목처럼 말이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런 현상은 직업에 대한 코드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1980년대 중반 이전의 직업은 생존을 위한 ‘밥벌이’ 수단이었다.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직업은 ‘꿈’과 동일시됐다. 경제 성장이 본격화하면서 노력하는 만큼, 꿈꾸는 만큼 이룰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직업은 다시 밥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콘텐츠는 이런 흐름을 반영해왔다. 1988년 방영된 ‘내일 잊으리’ 등 한국 드라마와 영화엔 주인공이 열심히 공부해 성공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1997년 나온 영화 ‘비트’엔 방황하는 청춘들이 등장한다. 작품 속 유명한 대사를 떠올려 보자. “나에겐 꿈이 없었어.”

요즘 콘텐츠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전문가들의 진솔한 얘기를 통해 진짜 직업을 찾는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기존에 구직자들의 직업 탐색은 제한적이었다. 검색을 하거나 채용 카페 등에서 합격 후기 정도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입사 이후의 삶은 지인이 없는 이상 알기 어려웠다.

퇴사자들도 콘텐츠를 통해 양지로 나오고 있다. 퇴사는 ‘버티지 못한 자’들의 패배로 인식됐고, 퇴사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SBS 교양 프로그램 ‘요즘 젊은 것들의 사표’ 등에서 퇴사자들은 당당히 자신의 꿈을 밝히고, 책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경험담도 소개한다.

지난 1월 발간된 이나가키 에미코 전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의 《퇴사하겠습니다》란 책엔 이런 말이 나온다. “물론 일을 할 때 느끼는 보람이 있죠. 그런데 돈을 받지 못해도 그 회사에서, 그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은 다시 신해철의 노래 가사와도 연결된다. “이거 아니면 죽음 진짜.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내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