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촛불’이 이제 기업을 겨냥하고 있다. 대통령 파면 직후 광장에는 ‘재벌 구속’ ‘재벌 해체’ 구호가 난무했다. 기름을 끼얹은 건 정치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경제공약 1호는 재벌 개혁이다. 재벌 개혁엔 여야도 보수·진보도 없다. 바른정당 대선주자인 유승민 의원도 재벌 중심의 경제를 수술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재벌 개혁론은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비대해진 대기업을 오너가 전횡하면서 ‘최순실 사태’ 같은 정경유착이 생겼다는 게 출발점이다.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대주주를 무장해제시키고, 법인세율을 올려 중소기업과 서민에게 나눠주자는 게 핵심이다. 소위 경제민주화다.

이런 전제는 상당 부분 오해다.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부터가 그렇다. 국내 상위 20대 기업의 매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3%다. 미국(12.1%) 일본(9.4%)보다 높지만 영국(26.3%) 프랑스(24.6%)보다는 낮다(2006년 기준). 주요 선진국의 중간 정도다. 그나마 경제력 집중은 완화 추세다. 30대 그룹 매출 비중은 2000년 44%였다. 2010년에는 36%로 떨어졌다. 10대 그룹 매출 비중은 같은 기간 37%에서 27%로 낮아졌다.

오너 경영의 폐해는 어떤가. 오너 체제냐, 전문경영인 체제냐는 본디 정답이 없다는 게 정답이다.

오너 경영에서 전횡이 문제라면 전문경영인 체제에선 대리인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의 성공은 오너의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주효했다는 게 정설이다.

‘최순실 사태’로 재벌의 정경유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기업은 이번 사태의 피해자다. 헌법재판소도 미르·K스포츠 재단에 대한 기업들의 출연은 정치권력이 기업의 재산권과 경영 자유를 침해한 데서 비롯됐다고 정리했다. 재벌개혁의 전제가 잘못됐다면 담긴 내용이 올바를 수 없다. 오진은 잘못된 처방을 낳고, 엉터리 처방은 멀쩡한 사람도 죽이는 법이다.

그런데도 선거 때만 되면 재벌개혁은 정치인들의 단골메뉴다. 대기업은 때릴수록 표가 나온다는 포퓰리즘의 유혹 때문일 거다.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사이다처럼 씻어주는 데 재벌 때리기만 한 것도 없다.

국민의 55%가 기업에 부정적 인식(한국경제신문·TV 설문조사), 즉 반기업 정서를 갖고 있는 한국에선 더욱 그렇다. 이런 단선적이고 감정적인 접근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에 해롭다. 기업 때리기로 훼손된 기업가정신은 투자와 고용을 줄일 뿐이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배아픔을 달래려다 배고픔을 부르는 꼴이다.

한국 재벌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일부 기업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불공정한 거래 관행, 상명하복 문화 등 고쳐야 할 점도 많다. 그러나 처방은 기업 스스로 해야 한다. 제대로 처방을 못한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치열한 경쟁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기업은 일자리와 국부 창출의 주체다. 때려잡고, 해체하고, 규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한 방향의 재벌개혁론으론 초가삼간만 태우기 십상이다.

기업들이 마음껏 뛰게 규제를 풀고, 경쟁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걷어내면 개혁은 시장에서 스스로 일어나게 돼 있다. 그런 환경에서 기업들이 야성(animal spirit)을 갖고 생존을 위한 분투를 계속해야 한다. 경제가 살고, 국민이 사는 길이다.

차병석 산업부장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