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훙하이와 전략적 제휴 가능성도…독자인수는 사실상 어려울듯

일본 도시바의 낸드플래시 반도체 사업 인수전이 예상 밖으로 판이 커지면서 인수에 나섰던 SK하이닉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인수 규모가 최대 25조원 이상으로 치솟으면서 자금 부담이 커진 데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IT(정보기술) 공룡들까지 인수전에 가세할 태세이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대만의 폭스콘과 손잡고 '도시바메모리'의 공동 인수에 나설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 판 커진 인수전…당초 2조원짜리가 25조원짜리로
4일 반도체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도시바는 당초 낸드플래시 사업 부문을 분사하면서 20% 미만의 지분만 매각하기로 했다.

원자력발전소 사업에서 입은 막대한 손실을 '알짜' 사업인 반도체 지분 매각으로 메우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원전 사업의 손실이 예상보다 커진데다 반도체 부문의 소극적인 매각이 흥행에 실패하자 도시바는 방향을 바꿨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반도체 사업의 과반 지분을 파는 방안도 검토한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급기야는 분사 후 설립될 '도시바메모리'의 주식을 최대 100% 팔겠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얹어 매각 금액을 극대화한 것이다.

그러자 당초 2조∼3조원대로 관측되던 인수 가격도 급격히 치솟았다.

일본 언론들은 최대 2조5천억엔(약 25조1천630억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업 가치 2조엔에 20∼30%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은 액수다.

낸드칩 사업의 경영권까지 확보할 수 있는 장이 열리자 군침을 흘리는 기업들이 크게 늘었다.

미국의 애플과 MS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기에 대만의 파운드리 반도체회사인 TSMC도 도시바 반도체 사업 투자로 협력 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는 소식도 보도됐다.

당초 19.9%의 지분을 매물로 내놨을 땐 SK하이닉스와 아이폰을 조립하는 대만의 폭스콘, 미국 반도체업체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웨스턴디지털(WD), 사모펀드 실버레이크 정도만 인수전에 뛰어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바는 반도체 부문 '도시바메모리' 지분 매각과 관련, 오는 29일까지 기업이나 투자편드로부터 출자비율, 금액 등이 담긴 제안서를 접수한다고 3일 밝혔다.

도시바는 3월 30일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반도체 메모리 사업 분사를 정식 결의한다.

우선협상 대상자는 6월께 선정할 방침이다.

◇ SK하이닉스, 인수 땐 단숨에 낸드반도체 1위
매각 규모가 커지면서 SK하이닉스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의 해외 기업 M&A(인수·합병) 중 최대 규모는 지난해 삼성전자가 발표한 미국 전장기업 하만(Harman) 인수 건으로 9조원대였다.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은 그 3배에 가까운 규모다.

SK하이닉스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작년 말 기준 4조원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SK하이닉스의 독자 인수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SK하이닉스로서는 D램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낸드 반도체 기술을 끌어올리며 단숨에 이 시장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낸드플래시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저장되는 메모리 반도체로,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의 저장장치에 주로 쓰인다.

정체된 D램과 달리 낸드플래시 시장은 당분간 폭발적인 성장이 예상된다.

SK하이닉스는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2위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에선 사정이 다르다.

작년 3분기 기준으로 삼성전자(36.6%)-도시바(19.8%)-웨스턴디지털(17.1%)에 이어 4위(10.4%)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낸드플래시 기술의 원조업체이자 여전히 이 분야 기술력에서 앞선 것으로 평가되는 도시바를 인수한다면 점유율이 47.3%로 껑충 뛰어오르며 단숨에 업계 1위로 도약한다.

SK하이닉스에게 도시바는 무척 탐나지만 소화하기엔 너무 큰 매물인 셈이다.

이런 가운데 폭스콘의 모기업인 대만 훙하이(鴻海)그룹의 궈타이밍(郭台銘) 회장은 도시바 반도체 사업 인수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 광저우 디스플레이 공장 착공식 뒤 도시바의 플래시 메모리칩 부문 인수를 위해 입찰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이(낸드플래시)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훙하이로서는 도시바 반도체를 인수할 경우 자사 제품에 쓸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반도체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와 폭스콘의 전략적 제휴 가능성이 제기된다.

25조원이란 막대한 금액 탓에 단일 회사가 독자 인수하기는 어려운 가운데 최태원 SK 회장과 궈 훙하이 회장의 각별한 친분을 고리로 양사가 도시바 인수를 위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25조원이라는 막대한 인수 금액을 분담해 부담은 낮추면서 필요한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면 양사 모두에 '윈-윈'이 될 수 있다.

궈 회장은 또 공개적으로 '타도 삼성'을 외치는 인사로도 유명하다.

SK와의 동맹으로 삼성 견제에 나설 수 있다.

훙하이는 현재 SK그룹 지주사인 SK㈜의 지분 3.5%를 보유한 4대 주주다.

2014년 훙하이가 SK 지분을 매입하면서 두 총수가 가까워졌고, 이후 IT(정보기술) 합작사 설립, SK텔레콤 루나폰의 폭스콘 생산, 폭스콘 충칭 스마트공장 사업의 SK 수주 등으로 다양한 협력을 이어오고 있다.

인수의 걸림돌은 자금 문제만이 아니다.

일본 재계와 정부는 반도체 핵심기술의 국외 유출을 우려하며 일본 기업에 매각해야 한다는 여론 조성에 나서고 있다.

도시바 역시 자금력, 1년 내 매각, 고용 유지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고 있어 인수 업체로서는 부담이다.

여기에 SK하이닉스는 이미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고 있어 도시바를 인수할 경우 미국,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반독점 규제 심사라는 문턱도 넘어야 한다.

매각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높아지자 인수전 개막 전부터 '승자의 저주'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인수에 성공하더라도 반도체 경기가 악화하면 외려 무리한 차입에 발목을 잡혀 경영난에 부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지분 인수 제안이 오면 검토해보겠다는 입장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도시바는 이달 30일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메모리 부문 분사를 정식 의결하고 입찰에 참여할 기업도 새로 모집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sisyph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