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신경가스
역사상 최초의 화학전은 기원전 5세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기록돼 있다.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와의 해전에서 유황 송진을 태운 독구름으로 적군을 공격했다. 이후로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아군 피해 없이 화학무기를 살포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대량 살상무기로 화학무기가 위력을 떨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다. 염소, 포스겐, 머스터드(겨자)가스 등 질식작용제가 실전에 사용됐다. 1915년 독일군은 벨기에 이프리스 전투에서 염소가스 약 200t으로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방독면이 없었기에 더 치명적이었다. 연합군도 맞불을 놓아 화학무기로만 9만명이 죽고, 130만명이 부상했다.

가공할 위력 탓에 1925년 제네바협약에서 생화학무기가 금지됐다. 그러나 영국이 러시아 내전(1919)에, 스페인이 북아프리카(1925)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1935~1940)에 수포작용제인 겨자가스를 썼다. 전쟁은 이기고 보자는 식이었다.

2차대전 때는 모두가 화학무기로 무장했다. 특히 독일은 타분(화학명 GA), 사린(GB), 소만(GD) 등 독성이 강한 신경작용제를 연이어 개발했다. 이른바 ‘German gas’라는 ‘G계열’ 신경가스들이다. 하지만 유대인을 가스실로 내몬 히틀러는 정작 패전 위기에도 화학무기를 쓰지 않았다. 1차대전 때 독가스를 마신 경험 때문에 이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군은 중국 침공 때 화학무기를 썼다.

흥미로운 점은 독일의 화학전에 대비해 미국에서 해독제 개발에 나섰다가 항암 화학치료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1940년대 겨자가스 독성 작용과정을 역이용해 최초의 항암제 머스틴을 개발했다. 독(毒)도 잘 쓰면 약이 된다.

냉전시대엔 미국과 소련 간 군비경쟁 속에 화학무기도 고도화됐다. 1950년대 영국에서 G계열보다 독성이 훨씬 강한 아미톤(화학명 VG)이 개발돼 12종의 ‘V계열’ 독성물질로 합성됐다. 이 중 VX를 미국이 60년대 초 신경작용제로 개발했다. G계열이 일시적인 반면 VX는 비휘발성으로 오래 지속돼 100배 이상 치명적이다. 이런 신경작용제는 살충제와 비슷해 생체 내 중추·자율신경계에 이상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한다.

1997년 유엔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선 신경가스의 사용·생산·판매까지 철저히 금지했지만 국지전에선 여전히 쓰이고 있다. 1995년 도쿄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처럼 무색·무취한 신경가스가 테러 수단화하는 게 더 큰 문제다. 북한이 공항에서 VX로 김정남을 암살한 것이 핵 못지않게 국제사회의 공분을 일으킨 배경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