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자기소개서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인가
내일이면 3월, 새 학기가 시작된다. 3월은 낯가림을 무릅쓰고 웃는 표정으로 서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달이다. 자기소개의 핵심은 무엇일까?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기 이미지다.

누구나 진지하게 자기소개서를 써본 일이 있을 것이다. ‘나’는 키, 몸무게,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 시험점수 등 숫자와 개별 정보들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자기소개서 속의 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낱낱의 수치와 제각각의 사건은 이야기의 고리로 연결돼 그럴듯한 인과관계를 구성해내고 하나의 자기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자기소개서는 그림으로 치면 자화상이다. 자화상을 수십 차례 반복해서 그리면서 화가들은 거듭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그들은 주로 붓을 들고 있는 자화상을 그리는데, 그 이유는 직업적인 특성상 손의 재능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론 낡은 의자가 같이 그려져 있거나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기도 한데, 이는 캔버스 앞에서 보낸 고민의 시간들을 말해준다. 창조적인 두뇌와 자유로운 영혼을 보여주는 자기만의 물건도 꼭 끼워 넣는다. 간혹 애완견이 자화상 속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본인의 성격을 슬쩍 드러내기 위함이다. 가령 오만하기로 악명 높았던 귀스타브 쿠르베는 자신을 꼭 닮은 도도한 개 코커스패니얼을 자기 옆에 그려뒀다. 자화상은 개인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그림으로, 얼굴과 성품만 닮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재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알리고 야심찬 비전을 담기도 한다.

화가의 자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화상으로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이처럼 확실한 표현을 한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은 매우 집중력 있는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는데, 언뜻 예수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흐트러짐 없이 위엄 있게 정면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완전한 정면은 오직 왕과 신의 아들인 예수를 그릴 때에만 허용됐던 자세다. 옷자락 위에 놓인 가늘고 긴 손가락은 섬세한 작업의 성격을 암시해준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는 ‘뉘른베르크 출신의 나, 알브레히트 뒤러가 불변의 색채로 스물여덟 살의 나를 그리다’라고 적어 넣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불멸의 생명을 상징하는 예수에 비유한 것이다.

각종 지원서를 작성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수십 번 써보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조직이 선호하는 인재상에 나를 맞추는 일이다. 학과가 원하는 인재상 또는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과 자신을 일치시키도록 설정하고 그렇게 행동하고자 노력하면 어느덧 그것이 자기욕구가 되고 자기발전의 지표로 굳혀질 것이다. 정말로 내가 꾸며낸 스토리대로 내 삶이 만들어져 간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런 삶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의심이다. 둘째는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나는 진정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는 내가 아닌 내 고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내가 알지 못하던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은 소중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도 큰 기대는 하기 어렵다. 자기소개서란 어느 조직에 소속하려고 쓰는 것이지 자기성찰이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학생들이 자기소개서에 써낸 보여주고 싶은 자기 이미지는 뒤러의 자화상처럼 당당하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현실의 파편들과 부딪히며 마주하는 자기 이미지는 ‘멜랑콜리(melancholy)’하다. 그것은 차라리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정신적 자아이자 사유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근사한 자기소개서와는 달리 캠퍼스 곳곳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처럼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상념에 빠진 학생들로 가득하다.

이주은 < 건국대 교수·미술사 myjoolee@konk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