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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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김민송 씨(33)는 최근 휴대폰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였다. 휴대폰을 교체하며 번호를 바꿨으니 새로 저장을 하라는 전화였다. 김 씨는 아버지의 바뀐 번호를 볼 새도 없이 터치 몇번으로 바로 저장했다. 이후에도 아버지의 번호는 외울 필요가 없었다. 연락처에서 아버지를 찾아 누르기만 하면 통화가 됐으니 말이다.

휴대폰이 사람의 기억을 대신하는 시대다. 휴대폰은 연락처, 일정, 각종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 필수 정보들을 담으면서 사용자의 기억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외우거나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다.

최근엔 홍채인식 기술이 스마트폰에 적용되면서 비밀번호를 외우는 수고도 덜게 됐다. 스마트폰은 정보 축적 능력이 갈수록 '스마트'해진 반면, 정작 스마트폰을 만든 사람의 기억 기능은 둔화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최근 온라인 설문 조사 기관이 582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도 이러한 현상을 방증한다. 응답자 중 34%가 '부모나 형제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또 48.8%가 ‘암기하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다’고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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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최선미 씨(37)는 아직도 고교시절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자주 통화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몇명이 됐건 기억해야만 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뇌리에 남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은 관계 지속을 위한 일종의 습관이었던 셈이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엔 전화번호부를 따로 갖고 다니지 않는 이상 번호를 기억하지 않고선 통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출현은 이러한 습관을 차례로 지워갔다. 가족의 전화번호와 생일을 기억하는 것 조차도 스마트폰의 몫이 되면서 사람들이 기억할 기회는 점점 줄었다.

당장 전화기만 들고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생각해 보자. 기자의 경우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번호는 생각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통화하던 친구, 동료들이었지만 번호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부모님 번호도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기억과 관련된 질병도 생겼다. 뇌의 활동이 줄면서 생긴 '디지털 치매(digital dementia)'다. 디지털치매는 스마트폰, PC 등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필요한 기억을 대신 저장해줘 사용자의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뇌에 저장되는 정보의 양이 지속 감소하면서 기억을 회상시키는 능력도 함께 감소돼 나타나는 질병이다.

▲지인이나 사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는 경우 ▲자신의 ID와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 ▲생일 등의 기념일이나 중요한 회의 일정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 ▲노래방 기기 없이 한 곡도 노래 부를 수 없는 경우 등이 이에 속한다.

전문가들은 치매와 디지털 치매를 구분하는 정확한 연구결과는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디지털치매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한다.

정신건강의학과 한 전문의는 "중요한 일정이나 전화번호 등을 뇌를 통해 기억하는 게 아니라 스마트 기기에 모두 저장해 놓기 때문에 뇌의 저장소 용량이 줄어든다"며 "기억은 뇌의 ‘해마’라는 곳에서 담당하는데 평소 기억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면 해마 영역이 위축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 등 몇몇 번호는 외우는 게 좋다. 중요한 일정은 수첩에 적는 등 평소 외우는 습관으로 뇌를 자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진욱 한경닷컴 기자 showg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