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트럼프의 만리장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그는 지난 21일 불법체류자 추방 등 강력한 내용을 담은 행정각서를 발표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말엔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국경 장벽을 쌓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불법 이민자들을 차단하겠다는 게 목적이다. 우리 언론은 이를 ‘미국판 만리장성’이라 빗대 전했다.

본래 만리장성은 중국 진시황 때 북방 오랑캐인 흉노족의 중원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이다. 유비무환의 가르침이 담긴 말이니 그럴듯한 비유였던 셈이다. 우리 속담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게 있다. 중국에는 없는 우리나라 토종 속담이다. 잠깐 사귀어도 깊은 정을 맺을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남녀 사이에선 짧지만 에로틱한 만남을 떠올릴 테고, 조금 점잖게 풀면 살아가면서 맺는 인연의 소중함을 말할 때 많이 쓴다. 그런데 이 속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가 있다. ‘인연의 소중함’보다는 ‘유비무환 정신’을 강조했다는 설이다.

조선 순조 때 다산 정약용은 《이담속찬》에서 이 말을 ‘一夜之宿 長城或築(일야지숙 장성혹축)’이라 옮긴 뒤 ‘비록 잠깐 동안이더라도 마땅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풀었다. 시쳇말로 ‘만사불여튼튼’이란 교훈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이담속찬은 1820년 다산이 중국과 우리나라 속담 391개를 엮어 펴낸 속담집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조재삼(1808~1866)이 편찬한 백과사전 《송남잡지》에는 ‘일야만리성(一夜萬里城)’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얘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남녀가 하룻밤을 자고 인연을 맺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왔을 때, 비록 단 하룻밤을 자고 가더라도 반드시 성을 쌓았다. 적을 막기 위해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속담이 원래 “하룻밤을 자도 만인(蠻人: 미개한 종족)은 성을 쌓는다”인데 그 말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본다(정민 외, 《살아있는 한자교과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경계의 뜻이 속담의 유래라는 얘기다.

‘하룻밤 만리장성’이 인연의 소중함을 말한 것이든, 유비무환의 경종을 울린 것이든 간에 뭐든지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에서 만리장성이라고 하면 지금도 ‘남녀 간 잠자리’와 ‘장벽’ 양쪽으로 다 쓰인다. 몇 달째 탄핵정국에 빠져 있는 우리는 지금 주변 강국들과 어떤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