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간 균형 맞췄던 동남아의 외교노선 변화할지 주목

김정남 암살에 북한 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북한과 말레이시아 관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말레이시아의 주권에 대한 침해 측면이 있는 데다 북한 측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며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임에 따라 양국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는 양상이다.

범행 현장에 있다가 본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인사 4명의 범죄인 인도 문제에 더해 범행에 개입한 것으로 지목된 북한 외교관이 쿠알라룸푸르 주재 북한대사관 부지 안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진 상황은 양국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번 사안에서 북한이 선선히 범행 개입을 시인하고 범인 신병을 말레이시아 경찰에 넘길 리가 만무하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단교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동남아 전문가인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23일 "처음에는 주 북한 대사의 철수나 대사관 폐쇄 정도를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심하면 단교까지도 고려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말레이시아 총리까지 나선 걸 보면 국가적 자존심 문제가 걸린 사안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연구위원은 "말레이시아로서도 사안을 매듭지으려면 최소한 (북한 측 인사) 몇 명은 처벌해야 할텐데 현재 체포된 사람(리정철과 실행범인 동남아 여성 2명) 정도 처벌해서는 국제적으로 처리가 됐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북한의 대외관계에서 그나마 '숨통' 역할을 해온 아세안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줄 전망이다.

아세안 각국은 매년 돌아가며 개최하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해왔다.

북한이 꾸준히 참가함으로써 ARF는 북한과 북한을 포함한 6자회담 당사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유일한 다자회의로서 국제사회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런 아세안과의 관계가 타격받으면 북한의 고립은 더 심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임성남 외교부 1차관은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향후 동남아 국가들과 북한의 외교관계에 대해 "말레이시아 국내 언론에서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 철폐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외교관계 격하 주장도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에 이어 발생한 이번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이 확증되면 아세안 차원에서도 이 문제가 큰 논의의 주제가 되고 여러 의견을 만들어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대체로 남북한 관계에서 눈에 띄게 한쪽 편을 들지 않고, 대화를 강조해온 동남아 국가들의 태도가 변할지도 관심을 모은다.

이재현 연구위원은 "동남아 국가들은 개도국 입장에서 국가이익을 위해 모든 국가에 관여(engagement)하는 것이 원칙이다 보니 북한과도 관계를 유지해왔다"며 "만약 이번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동남아 국가들은 한국이 대북 압박을 하라고 해도 북한과의 관계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jhc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