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죽하맹호도’(좌) · 겸재 정선의 ‘박연폭도’(우)
단원 김홍도의 ‘죽하맹호도’(좌) · 겸재 정선의 ‘박연폭도’(우)
겸재 정선(1676~1759)은 관념산수가 판치던 조선시대에 우리 고유의 미감을 담은 독자적 화풍인 ‘진경산수’를 개척해 회화사에 큰 자취를 남긴 화선(畵仙)이다. 말년에 자연을 벗 삼아 은둔을 즐기던 겸재는 1750년대 개성의 명물 박연폭포의 웅장한 모습을 긴장감 넘치는 구도로 화폭에 잡아냈다. 바로 ‘박연폭도(朴淵瀑圖)’다.

‘금강산도’ ‘인왕제색도’와 함께 겸재의 3대 명작으로 꼽히는 이 그림은 여산의 폭포를 바라보며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고 했던 이백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깎아지른 듯한 암애(巖崖)의 괴량감(塊量感)과 폭포의 소리마저 담아낸 듯한 장쾌한 붓질에서 겸재 특유의 개성을 읽을 수 있다.

겸재의 ‘박연폭도’를 비롯해 단원 김홍도,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한국 미술사를 빛낸 다섯 거장의 작품과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관훈동 노화랑이 새해 첫 전시로 지난 15일 개막해 오는 28일까지 펼치는 ‘한국미술사의 절정’전이다.

인사동 터줏대감인 노승진 노화랑 대표가 40년 동안 화랑을 운영하며 친분을 맺은 이우복 전 대우그룹 부회장 등 쟁쟁한 미술애호가들의 소장품 16점을 선보이고 있다. 개인 소장품이라 평소 쉽게 보기 힘든 작품으로, 총 보험가액만 400억원에 달한다. 조선 후기에 꽃을 피운 ‘진경미학’과 1950~1960년대 ‘한국의 미’를 한자리에 놓고 작품성은 물론 미술사적 의미까지 입체적으로 조명할 기회다.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와 사군자 대표 작가 임희지의 합작품 ‘죽하맹호도’는 대나무 아래에서 꼬리와 등을 세워 경계심을 곧추세운 호랑이의 자태를 섬세하게 잡아낸 걸작이다. 임희지의 대나무 그림 아래에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려 넣고, 서예가 황기천이 화평을 달았다. 호랑이의 솟구치는 기와 세가 쩌렁쩌렁하고, 문자향(文子香)이 전시장에 커피향처럼 번지는 느낌이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두 점도 우윳빛 미감을 발산한다. 살짝 주저앉은 둥근 형태에 연푸른 기운이 감도는 한 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서울 청담동 프리마호텔의 이상준 사장이 2007년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받아 주목받은 작품이다. 세계적 석학이자 문명비평가인 프랑스의 기 소르망 전 파리대 정치학연구소 교수가 백자 달항아리를 ‘한국 만의 미적·기술적 결정체’라고 극찬한 이유를 일깨워준다.

달항아리를 소재로 활용한 김환기의 작품도 걸렸다. 1960년대 제작한 유화작품 ‘산월’은 그의 달항아리 사랑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두툼하고 거친 질감으로 산 위에 솟은 둥근 보름달을 푸른색으로 그려 달항아리의 넉넉함을 연상시킨다.

‘황소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중섭의 풍경화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도 관람객을 반긴다. 1955년 통영 앞바다에 갓 피어난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 한마리가 봄기운에 화답하며 노니는 자태를 연극 무대처럼 꾸몄다. 지난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벚꽃과 새’라는 제목으로 소개돼 관람객에게 가장 인상적인 유화로 꼽혔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1955년작 ‘독서하는 소녀’를 비롯해 ‘산동네’ ‘여인’ ‘초가집’에서는 회백색의 화강암 같은 독특한 질감과 색채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미술사학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깃든 조선 후기 회화 세계를 바탕으로 진화해온 한국 미술사 300년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평가했다. (02)732-35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