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경찰은 19일 김정남 암살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북한의 반발이 수사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원칙대로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북한을 김정남 암살의 배후로 본 것이다. 한국 통일부도 이날 말레이시아 경찰 발표 직후 “용의자 5명이 북한 국적자임을 볼 때 (정부는) 이번 사건 배후에 북한 정권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논평을 냈다.
"김정남 암살 북한 용의자 4명, 17일 이미 평양 도착"
◆암살 용의자는 총 7명

노르 라싯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경찰청 부청장은 이날 김정남 암살에 관여한 용의자가 여성 2명을 포함해 총 7명이라고 밝혔다. 여성 용의자는 지난 15일과 16일 각각 체포된 베트남 국적의 도안티흐엉(29)과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25)이다. 나머지 용의자는 모두 북한 국적의 남성으로 지난 17일에 잡힌 이정철(47)을 비롯해 이지현(33), 홍송학(33), 오종길(55), 이재남(56) 등이다. 남성 용의자 수는 당초 4명에서 5명으로 늘었다. 경찰은 이와 별개로 이지우 등 북한인 3명을 사건의 단순 연루자로 파악해 추적하고 있다.

싱가포르 보도 채널인 채널뉴스아시아는 김정남 암살에 연루된 4명의 용의자가 지난 17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19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경찰 관계자와 정보통을 인용해 이들이 사건 당일 말레이시아에서 나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평양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여성 용의자 역할 수수께끼

이브라힘 부청장은 여성 용의자 2명이 암살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 중”이라며 확답을 피했다. 도안티흐엉과 아이샤는 공항 여행객에게 장난을 치자는 남성 용의자들 제안에 동참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언론 히트스트리트는 경찰 조사에서 도안티흐엉이 자신을 베트남의 인터넷 유명인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유튜브에 9개의 일상 영상을 올린 것이 확인되는 등 암살범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런 정황을 놓고 볼 때 이들이 진범이 아니라 조연이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지만 아직 확실치 않다. 일각에선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국인을 끌어들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신종 독극물 사용 가능성

경찰은 김정남을 죽음으로 몰고간 독극물이 무엇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브라힘 부청장은 “부검 보고서가 완료되지 않아 받지 못했다”며 “독성 검사가 끝나면 사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지난 15일 부검을 했으나 결과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어 정확한 사인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이 때문에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독극물이 기존에 알려진 종류가 아니라 새로운 물질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지 언론 더스타는 한 정상급 독극물 학자를 인용해 “범인들이 새로운 종류의 화학 물질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며 “여러 화학물질을 섞으면 종류 파악은 더욱 어려워진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독성물질에 경험 많은 전문가들마저 고개를 내젓고 있다며 “독성물질을 찾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정철이 수사의 ‘열쇠’

북한 국적의 남성 용의자들이 모두 말레이시아를 떠난 것이 확인되면서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정철이 수사의 ‘키맨(핵심 인물)’이 돼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정철은 두 번째 여성 용의자인 아이샤와 가장 먼저 접촉한 인물이다. 또 대학에서 제약을 전공해 독극물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 인도의 한 연구소에서 그와 일한 동료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가 독극물을 만들 수 있다”고 증언했다.

현지 일간 뉴스트레이츠타임스는 이정철이 북한 정찰총국 소속 요원이라고 보도했다. 정찰총국은 북한의 해외·대남 공작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이정철이 범행 후 말레이시아를 떠나지 않은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한 소식통은 “이정철이 구체적으로 북한 상부의 지시를 받은 암살단 리더가 아니라면 체포된다고 하더라도 윗선 연계가 드러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이정철을 남겼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과 외교 갈등 커질 수도

피살자가 김정남인지에 대해 말레이시아 경찰은 지금으로선 소지하고 있던 여권에 기재된 대로 김철(김정남의 가명)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브라힘 부청장은 “여권 위조 여부와 함께 DNA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원을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신은 과학적으로, 법적으로 가족임이 증명된 사람에게 인도할 것”이라며 “대신 유족이 직접 와야 인도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수사가 끝나면 시신을 북한에 인계하겠다는 당초 말레이시아 정부 방침에서 달라진 것이다. 향후 말레이시아와 북한 간 외교 갈등이 불거질 수 있는 부분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