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용 칼럼] 난세가 영웅 만든다지만
2차 세계대전 후 70여년간에 걸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서서히 쇠퇴하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 정책이 경제, 외교, 국방 등 각 분야에 걸쳐 전 세계를 혼돈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만약 여타 선진국도 미국을 좇아 자국 우선의 경제, 외교정책을 펼치면 세계는 예측불가능해질 게 뻔하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외부 환경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한국 사회는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정치 상황 앞에서 분열과 대치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어디로 흘러갈까. 탄핵과 특검 그리고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보다 나라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국민이 많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난국 타개보다는 권력에 대한 탐욕과 광기에 매몰돼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대선 잠룡 중 국가의 미래와 비전, 국가 운영 전략 등 큰 그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대선 후보 중 가장 준비돼 있다는 후보는 당선되면 재벌개혁, 법인세 인상, 규제 강화 등을 하겠다고 한다. 국가와 경제가 운영되는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고나 하는 말인지 의심스럽다. 이렇게 기업 때리기가 계속되면 경제는 어떻게 될까.

국력이라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곧 경제력이다. 그리고 경제의 주체는 기업, 가계(家計), 정부로 구성된다. 가계는 생산에 직접 참여하고 소비를 주도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다. 기업은 종업원에게 임금을, 주주에게는 배당을 하고 발생한 이윤에 대해서는 세금을 낸다. 정부는 기업과 개인이 낸 각종 세금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간다. 결국 국가가 만드는 부가가치, 즉 국부(國富)는 기업으로부터 나오며 가계와 정부 수입의 대부분은 기업에 의존한다.

기업은 일자리를 만들고 기술 혁신을 이끌어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는 가장 중요한 경제 주체다. 또 국가 연구개발 투자의 75%를 기업이 하고 있다. 세계는 바로 그런 기업을 키우기 위해 무한 경쟁 중이다. 트럼프는 당선되자마자 멕시코 공장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기업에는 높은 ‘국경세’를 물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한 세계적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러 미국 내에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압박하면서 법인세도 35%에서 15%로 낮추겠다고 했다. 일본 아베 신조 정부도 규제 철폐를 위한 특구제도 도입과 혁신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어지러운 난국을 틈타 대선 잠룡과 정치인들은 너나없이 기업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이 개혁 대상이라는 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정확히 알고나 그러는지 모르겠다. 세계 전자전기업체 중 1위인 삼성전자가 2015년 창출한 부가가치는 36조원으로, 국내 총부가가치, 즉 국내총생산(GDP) 1600조원의 2.3%에 달한다. 4대 그룹을 합치면 10%에 육박한다. 이들이 왜 정치인으로부터 ‘때리기’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만일 기업이 법을 위반했다면 그에 따른 처벌이 당연하지만, 반기업 정서를 조장해 기업을 희생양으로 삼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정치인들은 지금의 기업들을 키워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는지 모를 것이다. 오래 경영 일선에 몸담았던 경험에 비춰 보면 건실한 중견기업 하나 키우는 데 적어도 20~30년은 걸린다. 우리 대표 기업들은 대개 1960년대에 설립돼 반세기 넘게 정성 들여 키운 소중한 자산이다. 세계적인 기업도 망하는 것은 한순간인데 이렇게 기업 흔들기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 우려스럽다. 기업은 규제를 풀어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지원해주면 스스로 혁신할 수 있다. 제발 간섭하고 때리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히려 지탄받고 개혁해야 할 대상은 바로 정치와 정치인들 아닌가.

‘난세(亂世)가 영웅(英雄)을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영웅은 보이지 않고 권력의 탐욕에 빠진 잡룡(雜龍)들만 우글거리는 게 지금의 한국이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