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학습된 무기력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제의 드라마 미생 1화 때 장그래가 한 말이다. 지난주 미생 촬영 현장이었던 요르단 페트라를 다녀왔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릴 만큼 웅장한 바위틈 사이로 2㎞ 가까이 좁은 길(현지어로 ‘시크’)이 나 있었다.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었던 길이지만 그 길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산악 지역 바위틈으로 난 좁은 길을 벗어나면 거대한 광야가 펼쳐진다.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야 했던 바로 그 광야다. 사실 광야에서는 제대로 된 길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는 길만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지 항상 자문해 봐야 할 일이다.

이번 방문 목적은 우리 정부조달시스템인 나라장터를 요르단에 전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1년간의 노력으로 이번에 개통식을 하게 됐다. 투명성과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는 나라장터 시스템을 갖춘다는 것은 당사국에 일차적 도움을 준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기업들의 해외조달시장을 열어주는 길이기도 하다. 요르단은 우리가 나라장터시스템을 수출하는 일곱 번째 국가다. 중동지역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해외협력 사업 추진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당사국의 ‘학습된 무기력’이다. 선진국 지원을 바탕으로 한 번 사업이 진행되면 계속된 지원을 기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과 전략을 고민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내 일로 여기고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뚜렷한 전략을 마련하기보다는 계속 지원국 눈치만 보는 경우가 많다.

다시 드라마 미생으로 돌아가 보자. 마지막 20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며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이를 우리 조달시장에 대입해 본다면 나라장터는 벤처기업, 창업기업들에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공공조달을 통해 성장기반을 마련한 기업들에는 해외조달시장 진출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적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우리부터 ‘학습된 무기력’을 벗어던지고 나아가 보자.

정양호 < 조달청장 yhchung@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