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깨우는 한시 (24)] 누임양강수, 첨대반산운
[생각을 깨우는 한시 (24)] 누임양강수, 첨대반산운
호연지기(浩然之氣: 크고 올바른 내면의 기운)는 선비의 중요한 덕목이다.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며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길렀다. 하지만 잘나갈(?) 때도 재충전을 위해 호연지기는 필요하다. 두 가지 이유로 심산유곡에 누각과 정자가 만들어졌다.

왕이 다녀가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세조(1417~1468)도 물 구경을 좋아했다. 한양 인근에선 양평 양수리 물이 제일이다. 하지만 두물머리 곁에 서면 두 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큰물이 그냥 호수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근 운길산으로 올라갔다. 두 강의 만남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관수(觀水·물 구경)를 통해 호연지기를 길렀다.

이 인연으로 터를 닦고 누각을 세웠다. 짓는 비용보다 이후 관리비가 더 부담스럽다. ‘혼자 사는’ 승려에게 맡기는 것이 ‘가성비’가 제일 높다. 국고도 아껴야 성군이다. 알고 보니 신라, 고려 때도 물 구경 명당과 사찰 역할을 겸하던 폐사지였다. 언제부턴가 수종사(水鍾寺)란 이름이 붙었다. 수종(水鍾)은 ‘물이 모인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때 좌구명(左丘明)은 국어(國語)라는 역사책 속에서 “연못은 물이 모인 것이다(澤, 水之鍾也)”고 풀이했다.

왕의 자리에는 충성스러운 선비들이 찾아왔고 앞다퉈 시를 남겼다. 2002년 동산(東山) 스님은 수종사 관련 한시를 모아 시선다(詩禪茶)라는 책을 묶었다. 김창집의 글도 빠질 수 없다. “돛대 그림자는 (수종사) 선원의 창문으로 떨어지고(帆影禪窓落), 종소리는 (양수리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듣는다(鍾聲過客聞)”고 해 수종사와 양수리를 한 세트로 묘사했다.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선생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로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몽와(夢窩)다. 잦은 사화(士禍)로 유배와 복직을 거듭했다. 삼정승을 역임하고 몽와집(夢窩集)을 남겼다.

원철 <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