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우리는 연옥의 어디쯤을 헤맨다
우리는 부지런히 세상을 비난하고 대한민국을 저주한다. 안철수의 청춘 콘서트에 이어 장하성 교수의 소위 《분노하라》 따위의 책들도 청년들에게 종말을 선포한다. 지금 우리가 지옥의 일부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한다. 사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싸구려 강단이 그렇고 언론과 정치는 아예 저주의 초콜릿 공장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언론은 하루라도 사회를 동요시키지 못하면 스스로 불안해 어쩔 줄 모른다. 광우병에서 세월호, 메르스 등으로 위험한 신경병적 줄타기를 해오던 언론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것이 최근의 사태다. 거대한 신경병적 사회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의 세월호처럼 기우뚱거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지옥이다. 빈부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가난은 대물림되며, 노력해봤자 개선되지 않는다. 사회는 썩어 있고, 기업 경영은 부패의 동의어이며, 지금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도 일자리를 가질 수 없다. 부동산은 다락같이 오르기만 할 뿐이어서 마이 홈은 꿈에서나 가능하며, 결혼도 자녀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넘쳐흐른다. 독재가 횡행하고, 민주주의는 사라졌으며, 서민은 기득권의 피지배층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생존 경쟁은 너무나 치열하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착취하며, 잘해봤자 골목길 상권에서는 비명소리만 요란하게 터져 나온다. 일자리는 알바요, 인생은 오로지 비정규직으로 떠돈다. 그렇다. 인생은 에잇, ××!이다.

우울증적 자기학대는 일종의 한국인의 시대정신이다.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것은 잘 알려진 얘기지만 정치·경제에 대한 거의 모든 담론을 지배 관통하는 것은 바로 우울증적 자기비하다. 언론보도들은 중산층이 늘어났다는 객관적 수치는 배제한 채 “하류층이 늘어났을 것” “사다리가 끊어졌다고 생각한다”는 등의 ‘주관적 비관론’ 수치만 확대 보도한다. 부패지수 같은 것도 그렇다. “우리 사회는 부패했을 것”이라는 압도적인(53.7%) 응답은 “네가 직접 뇌물을 준 적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독일 영국과 거의 같은 100명당 불과 3명 수준이라는 수치로 바로 떨어지고 만다. 빈부 양극화의 가장 대표적 지표인 지니계수는 노무현 정부 말기였던 2008년 0.31 이후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세대 전만 해도 30년이나 걸리던 내집 장만이 지금은 12, 13년으로 줄었지만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한다. 욕망은 그렇게 자라난다. 지옥으로 달리고 있고 불행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야 비로소 안심한다. 아랫단의 고용률이 높아지면 당연히 전체 임금 편차가 확대되지만 이를 하위 근로자의 상대 임금이 줄어들었다고 해석한 것이 장하성의 소위 ‘분노’다. 하층민이 줄어들면 당연히 개천의 용도 줄어든다. 개천의 용이 줄어드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 개탄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보들은 이를 개탄한다.

갤럽의 행복 조사에서 한국인은 143개국 중 118위다. 불행하다는 사실이 확인까지 됐으니 크게 보도된다. 그러나 이는 주관적 반응에 대한 실로 얄팍한 조사일 뿐이다. 수명이나 교육 복지 등으로 객관적 행복을 평가하면 한국은 삶의 질이 187개국 중 15위로 껑충 뛰어오른다. 주관적으로는 지옥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연옥의 어디쯤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천국이 아니라고 해서 곧바로 지옥인 것은 아니다. 그럭저럭 꾸려간다는 것이 삶의 진면목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우울하다. 중장기적 사회 구조도 악화일로지만 최근에는 단기적인 경기 흐름까지 감각적이며 주관적인 비관론에 젖어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부정적 감정 성향이라고도 부른다. 온갖 종류의 비즈니스 서베이(BSI) 중 기준치인 100을 넘기는 지표도 거의 없다. 대부분 주관적 평가지표들은 아예 마이너스 영역을 헤매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도 많은 언론 보도가 4분기 제로 성장이라며 공포장사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0.4%였다. 아무도 바로잡지 않았다. 그렇게 저주는 되살아난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