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AI·로봇 시대에 공무원 늘린다는 발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에 이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했다. 세계가 경악하고 있지만 일자리 명분으로 무장한 트럼프는 마이웨이다.

트럼프의 생각은 간단하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이유를 세 가지로 봤다. 기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무역 장벽이 낮아지고 있는 데다 불법 이민이 늘어난 탓이라는 것이다. 해법도 단순하다. 나갈 기업을 막고, 나간 생산 시설을 불러들이면 된다. 그리곤 ‘하이어 아메리칸(Hire American)’이다. 대통령 업무를 시작한 뒤 연이틀을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 조찬을 하면서 생산 시설을 해외로 옮기면 막대한 국경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그다.

미국 기업도 대통령은 무섭다. 이미 많은 기업이 해외 투자를 포기하고 미국 내에 투자하겠다는 약조를 쏟아냈다. 트럼프 의도가 성공적으로 먹혀드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 공장을 이전하지 않기로 협약을 맺은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라는 기업이 있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받는 조건이다. 이 회사는 멕시코로 이전하는 대신 인디애나 공장에 160만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투자가 자동화에 집중되는 만큼 일자리와는 무관하다고 솔직히 말한다. 정부가 지원한다니 국내에 머물 뿐이다. 이런 식의 일자리 지키기는 오래갈 수 없다. 대부분 기업이 같은 생각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에서 수십년간 사라진 제조업 일자리 가운데 글로벌화에 의한 감소는 13%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자동화에 따른 생산성 향상의 결과다. 열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도맡는 식의 생산성 제고가 거듭됐고 밀려난 근로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하긴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자동화 차원을 넘어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시대다. 지금 기술만으로도 AI와 로봇이 일자리의 45%를 대체할 수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 가운데 65%는 현존하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일자리 총량이 줄어들지 않더라도 구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다. 육체 노동직과 창의적 업무를 하는 고소득 일자리는 늘어나지만 반복적 업무를 하는 중간 소득자의 일자리는 줄어든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뒤처지는 것은 개인의 실패이지만,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 문제가 된다. 그게 산업혁명을 거치며 형성된 보편적 교육의 근거다. 4차 산업혁명에서도 탈락자가 쏟아질 수 있다. 근로자들이 다른 일자리로 수월하게 옮겨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게 일자리 정책의 근간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혜안을 가진 지도자와 유연한 정치 시스템이다. 기술 발전의 속도가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빨라지면서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런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셈이다.

트럼프의 오판이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야 굳이 남의 걱정을 하겠는가. 하지만 트럼프의 정책을 지켜보면서 정작 걱정되는 건 우리 처지다.

대선후보들이 저마다 일자리 공약을 쏟아낸다. 하지만 일자리가 왜 없는지를 고민하는 후보는 없다. 정치 탓에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자기반성을 하는 정치인은 더더욱 없다. 노동4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규제프리존특별법이라도 통과됐으면 이 지경은 아닐 텐데 말이다. 오히려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법만 양산해낸다. 이들에게 4차 산업혁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묻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공공부문 일자리를 80만개 늘리고 근로시간을 줄여 민간에서 50만개를 늘리겠다는 구닥다리 공약이 난무한다. 재정과 임금 삭감에 대한 검토는 없다. 앞뒤 모를 모병제 공약이나 기본소득과 청년수당부터 주자는 포퓰리즘은 또 어떤지.

차라리 트럼프가 낫다. 일자리 창출의 주역은 기업이라며 법인세를 대폭 낮추고 정부 규제를 적어도 75%는 없애겠다는 당근책이라도 내놓았으니 말이다. 공무원을 20% 줄이겠다는 것도 그의 생각이다.

일자리 전쟁에 국경은 없다. 그 일자리를 선점해야 하는 데 한국의 정치인들은 왜 아직 이 모양인지.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