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예술가는 어른아이
20년 넘게 작가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을 닮아 가는 것 같다. 아이처럼 느끼고 생각해야만 훌륭한 예술가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실제로 아이처럼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좋아하는 일에 미친 듯 몰입하고,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작가들이 거장의 반열에 오를 확률이 높다. 일례로 나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 온 한 작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정받을 만큼 명성을 얻었지만 현실감각은 거의 아이 수준이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작가는 수십년 동안 가족과 떨어져 혼자 시골 작업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열흘에 한 번 정도 서울에 사는 부인이 작업실에 들러 반찬과 생필품을 챙겨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부간의 신뢰도 돈독한 편이다.

그런데도 굳이 집을 떠나 혼자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다 집에 가면 마치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불안하고 잠을 설치게 된다고 한다. 혼자 작업실에 있으면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한 데다 잠도 잘 잘 수 있는데 말이다. 어느 날,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진 작가에게 서울 집에 갈 일이 생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집 근처까지는 갔는데 자기 집이 어딘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부인과 통화한 뒤 겨우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아이처럼 자기 자신만 아는 데다 심지어 자기 집도 못 찾는 남편에게 부인이 불만을 털어놓지는 않았을까? 어림도 없다. 작가는 결혼 전 지금의 아내에게 충분히 자신에 대해 설명했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 스스로 선택했으니 자기 잘못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일반인의 눈에는 철없는 남편이요 이기적인 아버지로 비치겠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인간적인 약점을 보상해 주었다. 혼자 수도승처럼 생활한 덕분인지 독창적인 화풍을 개발할 수 있었고 현재 정상급 작가 반열에 올랐으니 말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예술가는 어른 아이다”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 현대 미술의 제왕으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는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어른이 돼 우리 안의 예술가를 어떻게 잃지 않느냐가 문제다”고 했다. 또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천재란 의도적으로 되찾은 어린 시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 savinalectur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