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인민위원회로 달려가고 있다
미국의 17대 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은 운이 나빴다. 남부 출신 부통령이었던 그는 링컨이 암살되자 졸지에 대통령이 됐다.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으로 권력의 뿌리를 분명히 하고 싶었다. 1867년 초 연극의 막이 올랐다. 의회는 ‘상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된 고위공직자는 상원의 동의 없이 대통령이 파면할 수 없다’는 내용의 공직자법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은 그러나 남부를 점령지처럼 취급해 왔던 스탠턴 전쟁장관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그랜트를 앉혔다. 두 권력은 정면충돌했다.

하원은 이듬해 2월 압도적 표차로 탄핵안을 가결시켰고 재판은 상원으로 넘어왔다. 언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광기에 사로잡혀 탄핵을 선동했다. 온 국민이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고함을 질러댔고 반대 의원들에게는 공개적인 살해 위협까지 퍼부어댔다. 공포가 지배했다. 그러나 나중에 케네디가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공화당 내 소수의 반란자들이 나타났다. 탄핵은 큰 혼란 속에 극적인 1표차로 부결됐다. 그 마지막 1표였던 에드먼드 로스는 “탄핵재판의 그날 내 무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며 공포의 순간을 회고했다. “만약 대통령이 불충분한 증거와 당파적 이해관계로 쫓겨나게 된다면, 대통령직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고 결국은 입법부의 종속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을 로스는 우려했다. 역사의 경과로 보건대 만일 그때 존슨이 탄핵됐더라면, 미국은 불과 5년 후인 1873년부터 시작된 20년 디플레 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인민주의에 추동된 끝에 가장 먼저 공산화 혁명의 비극 속으로 끌려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스는 그렇게 미국을 구해냈다.

고영태와의 더러운 추문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는 최순실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에 끌어들이기 위한 기폭장치요 연극무대였다. 그러나 정호성 등 증인들은 재판관의 양심을 흔들고 있다. 국회는 지금에 와서 “국회가 잘못(처리)했다, 탄핵사유서를 다시 쓴다” 하고, 때맞춰 헌법재판소는 “증거는 필요 없다. 형사재판 절차를 따르지 않겠다”는 놀라운 주장을 펴면서 일정을 재촉하고 있다. 특검은 걸리는 대로 구속영장을 쳐대고, 특검법에 명시되지도 않은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무차별적으로 감옥행을 명령하고 있다. 실로 무법천지다.

그러는 사이 국회는 신속하게 인민위원회로 재편되고 있다. 국회는 이미 사실상의 만장일치제 즉, 인민위원회로 변질돼 왔다. 국회는 입법 담합을 되풀이하면서 법안 맞바꾸기를 일상화했고 그 결과 헌법에도 없는 만장일치제로 바뀌었다. 탄핵의 승리자 민주당은 여기에 인사청문회법 개정안까지 추진하고 있다. 국회가 동의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각료의 임명도 해임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존슨이 직면했던 의회와 너무도 유사하다. 지금 국회에 제출돼 있는 공영방송 관련법은 이사진을 국회 의석비율로 정당들이 나누어 갖는 것이 골자다. 이미 방송위원회도 나누어 갖고 있다.

이렇게 되면 3권 분립의 국회는 인민독재 위원회로 전환되고 만다. 이는 정확하게 위헌이다. 만일 이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대통령을 탄핵했다면 이는 국회발 내란이며 쿠데타다. 민주당은 이미 교육부 과기부 등 핵심부처를 합의제 행정기구인 위원회로 바꾸는 정부조직개편안을 밝혀놓고 있다. 주요 행정기구를 국회가 지명하는 위원으로 보임하는 합의제 행정기구로 만들어 버리면 그 결과는 역시 의회독재다.

합의제 위원회는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만장일치에 이르고 만장일치는 필시 빅브러더의 존재를 만들어 낸다. 만장일치는 무능하거나 무력화되거나 둘 중의 하나다. 나치가 그랬고 소비에트 위원회가 그 점을 잘 보여줬다. 인민위원회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인민위원회는 결국 서기장을 불러낸다. 만장일치는 전체의 견해에 맞서는 소수를 매수하거나 암살하거나 아오지 탄광에 보냄으로써 유지되는 독재 제도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 정치에 독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험하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