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산업 반세기 이끈 박맹호 민음사 회장 별세…인간에 대한 믿음, 책 통해 실천한 '출판거목'
지난 반세기 국내 출판산업을 이끌어 온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22일 0시4분 별세했다. 향년 84세.

1933년 충북 보은 비룡소에서 태어난 고인은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청년이었다. 서울대 불문과 시절인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부산 정치파동’을 강력하게 풍자한 단편 ‘자유 풍속’으로 당선됐지만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취소됐다.

소설을 쓰는 대신 천재 작가를 발굴하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에 출판사를 세운 게 33세 때인 1966년이었다. 서울 청진동의 10평짜리 옥탑방에 ‘민음사’를 차렸다. ‘민음’은 ‘올곧은 백성의 소리를 담는다’는 의미다. 당시 국내 책시장에 판을 치던 일본책 해적판을 몰아내고, 우리의 얼을 담은 서적을 채우겠다는 게 목표였다.

“새롭지 않으면 썩는다”는 신념으로 ‘도전정신’을 강조했던 고인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했다.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한수산, 이문열 등의 소설가를 발굴했고 커다란 시집뿐이던 당시에 현재의 시집 크기인 국판 30절을 세계 최초로 만들면서 시 대중화를 이끌었다.

일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출판계도 혁신했다. 세로쓰기 편집 방식을 고수하던 출판계에서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시도했다. 전집류 외판 위주였던 출판계의 패러다임도 단행본으로 바꿨다.

우리 아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색깔과 그림을 보게 하자는 뜻에서 1994년 아동서 전문 출판사 ‘비룡소’를 열었고, 한국 과학의 후진성을 면하려면 출판사가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며 과학전문 출판 자회사 ‘사이언스북스’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책의 미래가 어둡다고 걱정할 때도 그는 “시대에 맞춰 좋은 책만 펴낸다면 출판은 영원하다”고 낙관했다. “책은 인간이 타고난 유전자이며, 인간은 책을 통해서만 완성된다”는 이유였다. 1973년 시작한 ‘세계시인선’을 비롯해 ‘오늘의 시인 총서’ ‘세계문학전집’,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한 ‘대우학술총서’, 발터 베냐민의 문예이론 등을 국내에 소개한 ‘이데아총서’ 등 숱한 기획물은 고인의 도전과 열정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출판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화관문화훈장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을 지냈다.

1960년대 출판사 ‘인문서점’을 함께 차렸던 고은 시인, 박 회장의 제안으로 베스트셀러 《평역 삼국지》를 일간지에 연재했던 이문열 작가가 평생 문우다. 고은 시인은 “그는 늘 감각이 앞서 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이문열 작가는 “문화적 균형이나 정신적 이해의 측면에서 이만한 출판인을 다시 만나기 어렵다”며 “정말 거목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 씨와 상희(비룡소 대표), 근섭(민음사 대표), 상준(사이언스북스 대표)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 24일 오전 6시.

고재연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