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로 화백이 서울 인사아트센터 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작품 ‘문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명로 화백이 서울 인사아트센터 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작품 ‘문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추상화의 거장’ 윤명로 화백(81)이 작업한 두 장의 그림이 51년 간극을 두고 전시 공간을 달리해 걸려 있다. 부식된 동판, 은가루, 유화물감 등을 재료로 손가락을 사용해 역동적인 화풍을 유감없이 보여준 ‘문신’과 홍채를 활용해 자연의 기세를 부각시킨 ‘바람 부는 날’이다. 하얀 암벽과 금빛이 도는 푸른 숲의 대비가 강렬한 후자가 예전 작품 같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고전미술에 반대해 발생한 유럽 전위미술(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문신’은 1964년 작품, ‘바람 부는 날’은 2015년 작이다. 앵포르멜의 영향으로 추상화를 시작한 지 60년 가까운 세월. 윤 화백은 “그간 세상은 바뀌었고 나는 늙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기억이 바위에 새겨진 글자처럼 각인돼 있다”며 추상화에 대한 변함 없는 애정을 내보였다.

윤 화백이 18일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그때와 지금’을 주제로 대규모 회고전을 시작한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뉴욕 프래트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공부한 윤 화백은 1960년대 이후 한국 추상미술을 주도해온 대표 작가로 손꼽힌다. 1959년 작품 ‘벽 B’로 국전에서 특선을 받았으나 이듬해 ‘60년 미술가협회’를 창설해 반(反)국전 운동을 주도했다. 서울대에서 30여년간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한 뒤에도 우리 것에 대한 탐구를 이어오며 자신만의 추상회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오는 3월5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10년을 주기로 큰 변화를 보인 그의 시기별 대표작과 판화 등 60여점을 걸었다. 그야말로 자유자재의 경지에서 인간과 자연을 응축한 작품들이다.

토템에서 영감을 받은 구조적 추상에서 시작된 그의 작품세계는 국제적인 추상회화의 큰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1960년대 ‘문신’ 시리즈에 이어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모색한 1970년대 ‘균열’, 전통적인 사물에 행위를 결합한 1980년대 ‘얼레짓’, 1990년대 ‘익명의 땅’, 2000년대 ‘겸재예찬’ 시리즈 등을 차례로 선보였다. 근래에는 동서양의 만남을 치열하게 탐구하며 내면의 정신세계를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다.

윤 화백은 최근 붓 대신 싸리 빗자루로 작업한 ‘고원에서’ 시리즈를 내놨다. 그림이 미답의 세계를 연출하는 것인 만큼 2000m가 넘는 고원에서 새로운 예술을 수렴하고 싶어서다. 신작들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드넓은 고원에 펼쳐진 눈부신 햇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저마다 머리칼을 쭈뼛 세운 산세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고정된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지 않지만 화면은 보는 시점에 따라 색깔이 변화하면서 다양한 현상으로 다가온다.

예술의 본질을 ‘추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윤 화백은 작품의 미술사적 해석이나 미학적인 담론보다 창작 과정을 중시한다. 그는 “어떤 의도를 갖고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어떻게 전개할지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창조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과정인데 몸을 도구 삼아 거칠게 몰아붙이는 폭풍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02)730-102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