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설악·제주 등서 길어올린 겨울 풍경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이야기, 가까스로 다리목을 빠져나간 스노 체인의 꾸불꾸불한 이야기, 눈먼 자의 동쪽이 거기였던가, 아침마다 해가 몰려오던, 이제는 44번 국도 너머로 사라져 간 이야기, 딱 맞아 떨어지는 마침표도 없이” (‘눈먼 자의 동쪽 이야기-내설악일기·20’ 부분)

오정국 시인(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사진)이 여섯 번째 시집 《눈먼 자의 동쪽》(민음사)을 냈다. 한겨울 머나먼 여행을 떠나는 느낌의 시집이다. 겨울철의 내설악,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제주를 주제로 한 연작시가 실렸다.

“터널 밖에는/얼어 터진 강바닥이 있고/사흘 밤낮의 눈보라가 있고, 그리하여//이토록 깊고 어두운 내설악의 밤이 있다 산짐승처럼 웅크린”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강원 어느 산중에 있을 법한 터널을 주제로 한 ‘터널 밖에는’이다. 이어 스무 편의 내설악일기(日記) 연작시가 나온다. 내설악 주민 삶의 모습, 도시에서 온 관광버스 행렬, 황량한 설산 풍경, 산짐승의 생존 분투기 등을 담고 있다. “강줄기 한복판의 얼음장이 가장 시퍼랬다 거기서 누가 수심을 잰 듯, 나무 막대기가 수직으로 꽂혀 있었고, 그걸 꽂아 둔 이는 보이지 않았다” (‘햇빛의 책방-내설악일기·13’ 부분)

비슈케크와 제주에서도 황야를 헤매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터무니없는 억측이 아니었다 지척 모를 안개가/산 계곡을 뒤덮어 세 번째 산행도 벼랑 끝에 서게 됐다/한 번은 강추위로, 그 다음은 폭설로/발이 묶인 곳 알라하르차//여기가 허락된 발걸음인 것/범접 못할 비경은 절대의 영역인 것/터무니없는 억측이 아니었다 지척 모를 안개가/하산의 벼랑길을 캄캄하게 파묻었다” (‘어느 생의 언젠가를-비슈케크일기·5’ 부분)

“언어적 시계(視界)를 떠올리게 한다”는 조강석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다른 지역을 배경으로 쓴 시들도 겨울의 쓸쓸한 여정을 연상케 한다. 오 시인은 ‘작가의 말’을 통해 “내 목숨의 허기를 쫓아 참 많이 떠돌았다. (중략) 그 황홀하고 처연했던 중얼거림을 여기에 담는다”고 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