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음악 이어 이젠 '책맥'까지…서점의 재탄생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여름, 한 서점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95년 역사의 종로서적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종로서적이 지난달 23일 다시 문을 열었다.

동네에는 작은 서점들도 생겨나고 있다. 오래전부터 책방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서점 주인이란 명함을 파고 있다. 제일기획 부사장 출신인 최인아 씨는 자신의 이름을 건 ‘최인아 책방’을 지난해 8월 열었다. 카피라이터 출신인 유수영 씨는 추리소설 전문 서점을 냈다. 유희경 시인은 시집 전문서점을, 개그맨 노홍철과 가수 요조도 각각 특징 있는 서점을 열었다.
서울 상암동에 있는 서점 ‘북바이북’에선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책맥’을 즐길 수 있다. 연합뉴스
서울 상암동에 있는 서점 ‘북바이북’에선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책맥’을 즐길 수 있다. 연합뉴스
서점이 부활하고 있다. 유행처럼 생겨나고 있는 서점은 과거의 그것과 다르다. 더 이상 책만 팔지 않는다. 색다른 아이디어, 놀이와 결합하며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이들 서점에 가는 사람들은 책을 사러 가기보다 문화생활을 즐기러 간다. 독서를 통한 생각의 장이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다시 태어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독서는 언제부턴가 숙제처럼 여겨졌다. 숙제를 미루는 것처럼 책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늘었다. 성인들의 연간 독서량은 2008년 11.9권에서 2015년엔 9.1권으로 감소했다. 독서량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이를 무겁게 받아들였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더 멀어졌다.

하지만 최근 서점의 변화는 인식의 전환을 이끌고 있다. 대형 서점은 일본의 쓰타야 서점을 본떠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교보문고가 대표적이다. 오디오도 판매하고 그림도 전시한다. 음식과 음료도 즐길 수 있도록 모든 공간이 이어져 있다. 1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소나무 책상은 책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게 해준다.

동네 책방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책과 술이 자리를 함께한다. 서울의 ‘북바이북’, 전주의 ‘북스포즈’ 등에선 ‘치맥(치킨+맥주)’ 대신 ‘책맥(책+맥주)’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와의 만남은 물론 미니 클래스 등도 전국 서점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갇혀 있던 ‘베스트셀러’란 굴레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세계서점기행을 쓴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세계의 명문 서점들은 베스트셀러를 강요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스스로 책을 선택할 수 있게 다양한 주제의 책을 ‘선책(選冊)’할 뿐”이라고 말한다. 최근 생겨난 동네 서점들은 이를 닮아가고 있다. 최인아 책방은 3분의 1에 달하는 1600여권의 책을 지인들의 추천서로 채웠다. 다수에게 그저 ‘괜찮다’ 정도로만 남은 작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강렬하게 다가온 책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모두가 똑같은 모양의 책을 들고 서 있던 서점의 모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새롭게 재탄생한 서점은 생각을 넓히는 둥지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생각의 확장은 빈곤한 토론 문화를 바꿔줄 자양분이 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독서량이 세계 1위인 스웨덴에선 토론문화가 발달했다. ‘라곰(lagom)’을 위해서다. 라곰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함을 의미한다. 라곰에 이르기 위해선 다양한 사람과 토론해서 합의점을 도출해야 한다. 그래서 토론은 스웨덴 사람들에게 하나의 습관이 돼 있다. ‘대학’이 아니라 더 나은 ‘대화’를 위한 독서 공동체가 형성된 이유다. 책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 공동체가 우리에겐 아직도 낯설다. 우리도 서점의 변화에 힘입어 라곰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