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 따른 죄"…칼날 위에 선 삼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이 12일 오전 9시27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BBC NHK 등 외국 방송 카메라가 부지런히 돌아갔다. 카메라 플래시도 수없이 터졌다. 이 부회장의 출두 모습은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월스트리트저널, 로이터, 블룸버그 등은 ‘삼성 후계자가 뇌물스캔들로 특검 조사를 받는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CNN머니는 “삼성의 이미지 실추는 작년 갤럭시노트7 발화 때보다 더 크다”고 보도했다. 한국 대표 기업인 삼성이 수십년간 쌓아 올린 브랜드 가치가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삼성뿐 아니라 최순실 씨 측으로부터 돈을 요구받아 ‘제3자 뇌물죄’ 혐의를 받고 있는 SK 롯데 부영 등도 특검의 칼날 아래 있다. 이들 기업은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최씨 측에 돈을 지원하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게 검찰 수사 결과다.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승마협회 지원에 소극적이란 이유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기업활동 인허가권과 검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통할권을 쥔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기업인이 한국에 몇이나 될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특검에 소환된 12일 서울 삼성 서초사옥 모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특검에 소환된 12일 서울 삼성 서초사옥 모습.
특검은 그런 기업인을 박 대통령과 한통속으로 몰아 뇌물죄로 기소하려 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민심을 ‘기업 때리기’로 달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특검이 국정농단을 비호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은 부르지도 않고 기업인만 집중 수사하고 있다”며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이 기업 특검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주요국들은 법인세 인하, 기업 투자 유치, 보호주의 확대 등으로 자국 기업을 도와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데 열심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법인세율을 현행 35%에서 15%로 낮추고 인프라에 투자하면 세액을 공제해주는 방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 영국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은 세계 경제 전쟁터에서 싸워야 할 대표 기업들을 응원하기는커녕 범죄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사장과 마윈 중국 알리바바 회장 등이 트럼프 당선자를 만나 사업 협력을 논의하는 모습은 최근 국내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글로벌 위상으로 봐서 당연히 트럼프 당선자를 만났어야 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특검의 출국금지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현재까지 트럼프 당선자를 만난 한국 기업인은 아무도 없다.

“나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광기와 검찰 공명심의 희생자였다.” 론스타에 대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으로 구속기소됐던 변양호 보고펀드 고문(전 재경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2009년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구치소를 빠져나오면서 한 말이다. 당시 외환은행 매각 차익으로 수조원을 챙긴 사모펀드 론스타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검찰의 대대적 수사로 이어졌다. 행정고시 수석합격자(19회)이며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15인’(월스트리트저널)에 꼽혔던 변 고문은 뇌물 40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4년4개월간 재판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변 고문을 기소한 장본인이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던 박영수 특검이다. 그는 별건인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까지 붙여 변 고문의 구속기간을 늘려가며 수사했다. 변 고문은 두 사건 모두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변 고문의 명예와 심신이 받은 상처는 아직 보상받지 못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