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무대
학창 시절, 용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있다. 집 앞 길 건너의 자그마한 레코드숍이다. 맘씨 좋은 주인아저씨는 방송국에서 일하다 은퇴한 음악애호가였다. 1000원과 함께 리스트를 작성해 전달하면 여러 음반의 노래들을 카세트테이프에 담아줬다. 그것은 최고로 인기 있는 친구 생일선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저작권 침해의 불법행위지만 그 시절에는 이게 낭만이었고 멋스러운 일이었다. 하굣길 길거리에 내놓은 스피커로 크리스마스캐럴을 들려주던 계절이 흐르는 풍경은 이젠 사라졌다.

잡식성(?)이던 음악 취향 때문에 가요나 팝송, 심지어 ‘성음’ 브랜드가 선명히 박혀 있는 하얀 카세트테이프의 클래식 음악까지 가리지 않고 즐겼지만, 특히 잊혀지지 않는 뮤지션도 많다. 대표적인 이가 휘트니 휴스턴이다. 새 앨범이 발매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남보다 빨리 구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끝 모를 하이톤의 선율을 능숙하게 넘나들던 그녀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신비롭고, 정겹고, 따뜻했다. 케빈 코스트너와 주연으로 나온 영화는 정말 장안의 화제였다. 얼마 전 그 영화가 공연으로 환생해 국내 무대에서 막을 올렸다. 바로 뮤지컬 ‘보디가드’다.

영화 ‘보디가드’가 제작된 것은 1992년이다. 희뿌연 연기를 배경으로 여가수를 번쩍 들어 안고 서 있는 사설 경호원의 모습은 훗날 뮤지컬 포스터 이미지로 쓰일 정도로 유명한 이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감독을 맡은 믹 잭슨은 영국 태생의 TV 연출가였는데 안방극장에서 단련된 특유의 감수성과 서스펜스를 적절히 활용해 글로벌 흥행작을 잉태해냈다. 스토커가 옥죄어오는 범죄물 특유의 긴장감 속에 평소엔 무뚝뚝해도 아이와 잘 교감하는 섬세한 보디가드와 매력적인 인기 여가수의 애틋한 사랑, 그리고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 여가수 언니와의 긴장감은 당시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재미로 글로벌 흥행을 이뤄냈다. 영화는 250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4억1100만달러의 티켓 판매액을 달성했다. 환산하면 30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5000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한 초대박 흥행 사례다.

뮤지컬은 영화가 나온 지 20여년 뒤인 2012년 등장했다. 워낙 유명세를 누리던 원작의 무대적 변용이다 보니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덧붙여졌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무대 형식의 파격적 변화다. 영화 스토리를 가져왔으니 기본 틀은 추억의 명화를 뮤지컬로 바꾼 ‘무비컬’에 속하지만, 스크린에 나오지 않던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대거 삽입해 아바의 음악으로 제작한 ‘맘마미아!’ 같은 주크박스 뮤지컬의 특성도 추가해놨기 때문이다. 그 시절 휘트니 휴스턴 LP 음반을 수집해봤거나 영화관을 찾은 사람이라면 무대는 하나의 커다란 ‘향수’이자 ‘복고’의 매력이 담긴 추억의 콘텐츠가 아닐 수 없다.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노래들,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나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을 무대의 대형 스피커를 통해 라이브로 감상한다는 상상 하나만으로도 뮤지컬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추운 겨울도 잊게 하는 훈훈한 무대라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말 무대에선 인기 뮤지컬 배우 정선아가 정말 노래 잘하는 가수 양파, 손승연과 함께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들을 들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첫 소절이 시작될 때마다 객석에선 감탄이 들린다는 점이다. 원곡 선율이 너무 좋고, 한국 출연진의 가창력이 놀라워서다. 공연장에서 라이브로 만끽해보기 바란다.

원종원 <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