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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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비즈니스 리더이자 국제 협상가다. 그보다 더 준비된 국무장관 후보를 찾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해 12월13일 차기 행정부 국무장관 후보로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최고경영자(CEO)를 지명하며 이같이 밝혔다. 틸러슨은 부자인 백인 남성 사업가 위주로 구성된 트럼프 내각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가진 인물이다. 2015년 한 해 동안에만 연봉·보너스·주식 등으로 2730만달러(약 330억원)를 받았다.

그는 외교·정무 경험이 거의 없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가 내각의 맨 첫 번째 자리인 국무장관에 중용될 가치가 충분하다며 “세계적인 수준의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트럼프와 틸러슨은 비슷한 점이 많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틸러슨을 들여다보는 것은 트럼프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입사 30년 만에 CEO로

2013년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CEO에게 우정훈장을 수여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타스통신
2013년 렉스 틸러슨 엑슨모빌 CEO에게 우정훈장을 수여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타스통신
틸러슨은 미국 텍사스주 위치타 펄스 출신이다. 텍사스오스틴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1975년 23세에 엑슨모빌(당시 엑슨) 신입사원이 됐다. 그리고 쭉 엑슨모빌에 다녔다. 그것이 그의 커리어 전부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는 꾸준히, 단계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바닥에서 시작해서 월급쟁이의 꿈인 CEO 자리에 올랐다. 엑슨모빌 홈페이지에 소개된 이력서는 수년 단위로 승진을 거듭한 그의 숨가쁜 승진 스토리를 담고 있다. 1989년 불과 37세 나이로 엑슨의 미국 중부생산부서 관리자로 임명됐다. 텍사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캔자스의 원유 및 가스 생산업무를 총괄했다.

3년 뒤에는 엑슨의 생산고문으로 임명됐다. 1995년 예멘법인 대표, 1998년 엑슨벤처스 부사장, 1999년 12월 엑슨모빌 개발부문 부사장, 2001년 8월 엑슨모빌 선임부사장, 2004년 엑슨모빌 대표 및 이사를 거쳤다. 2006년에는 54세로 엑슨모빌 CEO 겸 이사회 의장으로 승진했다.

2010~2012년 33회 미국 보이스카우트 회장을 맡았다. 지난해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당초 부시 가문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를 밀었으나, 부시 전 주지사가 경선에서 맥없이 탈락하자 트럼프 쪽으로 돌아섰다. 4명의 자녀를 뒀다. 기후 변화가 ‘중국에 의해’ 날조됐다는 트럼프와 달리 기후 변화를 인정하는 편이다.

러시아와의 연계

엑슨모빌 CEO로서 틸러슨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비(非)회원국 가운데 가장 산유량이 많은 러시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그가 러시아를 통해 현재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1990년대 후반 엑슨모빌 개발부문 부사장으로 러시아를 담당할 때 모스크바 동쪽지역에서 오랫동안 관료주의적인 무관심 속에 버려졌던 170억달러짜리 유전을 재개발했다. 이 유전에선 2005년부터 하루 수백만배럴을 뽑아낸다. “엑슨모빌의 글로벌 포트폴리오 왕관에 보석을 추가했다”는 평을 듣는 이유다.

휴스턴대의 원유산업 전문가인 조지프 프랫은 “러시아가 틸러슨의 커리어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1990년대 그가 러시아에서 거둔 성공이 엑슨 본사 경영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틸러슨이 러시아와 20년 가까이 관계를 지속해 왔다”고 하는 배경이다.

그는 2013년 러시아 정부에서 우정훈장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는 그가 2012년 6월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와 북극의 카라해 시추사업을 같이하며 서시베리아 일대와 흑해 등의 셰일오일 개발에 참여하기로 약속한 뒤 이 훈장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로 병합하며 2014년 미국 및 유럽연합(EU) 등 서방 국가의 경제제재를 받고, 이로 인해 협력사업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엑슨모빌은 이미 6억5000만달러를 카라해 탐사 시추에 쓴 상태였는데 채굴된 원유는 쥐꼬리만큼에 불과했다. 틸러슨은 백악관을 자주 드나드는 인사였는데 2014년 이후 5차례 방문에서는 대(對)러시아 제재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엑슨모빌의 유럽 경쟁사들이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뛰어난 협상가 자질 발휘할까

트럼프는 친(親)러시아 성향을 감추지 않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대선 개입을 이유로 러시아를 제재하고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 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러시아 제재를 해제하면 엑슨모빌은 그 수혜를 직접적으로 받을 것이 유력하다. 엑슨모빌 CEO 자리에선 물러났지만 엑슨모빌 주식과 연금 등 관련 보유자산이 2억1800만달러에 이르기 때문에 이행상충 문제가 존재한다. 다만 청문회 통과 후 보유 주식을 처분해서 이를 해결할 수도 있다고 포브스는 전했다.

이런 이력 탓에 그가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갖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라인스 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는 “그는 국제관계와 국제법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고 협상을 어떻게 제대로 하는지 알고 있다”며 틸러슨 카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탈리아 국영 에너지회사 에니의 클라우디오 데스칼치 CEO는 “틸러슨은 매우 좋은 협상가이고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며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라며 “러시아뿐만 아니라 자신이 일했던 국가들과 모두 같은 방식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틸러슨의 아킬레스건이 될지, 최고 정치적 자산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가 서로에게 가진 호의와 경쟁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역할을 틸러슨이 맡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