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딸깍발이를 찾는 이유
조선 정조 때 남산골 묵적동(지금의 서울 장충동 지역)에 살던 가난한 선비가 있었다.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다. 종일 글 읽기만 좋아해 부인이 남의 집 바느질품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부인 성화에 못 이겨 그는 집을 나와 지금으로 치면 매점매석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종잣돈은 도성의 갑부 변씨에게서 빌린 1만냥이다. 변씨는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선뜻 돈을 내준다. 변씨가 본 것은 단 하나, “그는 옷과 신발이 누추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시선은 오만하며,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로 보아 재물에 욕심이 없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린 한문소설 ‘허생전’ 얘기다. 선비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인공 허생처럼 남산 기슭에 살던 궁핍한 선비를 가리켜 ‘남산골 샌님’이라 불렀다. ‘딸깍발이’라고도 했다. 샌님은 ‘생원님’의 준말이다. 예전에 아랫사람이 선비를 이를 때 생원님이라고 했다. 샌님은 요즘 얌전하고 고루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남산골은 가난한 양반과 하급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세도가들이 살던 북촌에 견주어 남촌이라고도 했다. 딸깍발이는 ‘가난한 선비’를 일컫는다. 신발 살 돈이 없는 선비들이 비 올 때 신던 나막신을 맑은 날에도 신고 다녔다. 이때 나는 딸깍딸깍 하는 소리에서 비롯된 말이다.

작고한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수필 ‘딸깍발이’에서 묘사한 이들의 성향이 압권이다. 툭하면 끼니를 거르는 판에 엄동설한이 닥쳐도 방구들 덥힐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뼈가 저려오는 냉돌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이를 오도독 갈며 입으로 추위와 싸운다. “요놈, 괘씸한 추위 놈. 어디 내년 봄에 보자.” 사실로 졌지만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이 이들의 생활신조였다.

선비는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다.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한자어 같지만 토박이말이다. 이들은 체면을 목숨처럼 중시했다. 체면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다.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차라리 냉수 한 그릇 들이켜고 보란 듯이 이쑤시개를 뽑아 들었다.

경제 여건은 안팎으로 어려운 데다 정치 상황은 갈수록 안갯속이다. 눈앞의 이익만 좇기에 급급한, 약삭빠른 지식인은 늘 넘쳐난다. 새해를 여는 첫 주에 새삼 ‘딸깍발이’가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