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한국 외교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사드에 대한 중국의 보복이 점점 더 노골화하는 가운데 호전 기미를 보이던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현 정부 들어 계속 냉랭한 관계를 이어오던 한·일 양국은 2015년 말 위안부 합의를 통해 그나마 관계개선의 물꼬를 텄다. 또 지난해 8월부터는 중단했던 통화스와프 재개협상을 시작했고, 11월에는 한·일 군사비밀 정보보호 협정도 체결했다.

하지만 최근 야권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위안부 합의 및 정보보호 협정 폐기 요구는 회복조짐의 양국관계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야권은 ‘최순실 게이트’를 빌미로 현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을 뒤집을 태세다. 더욱이 지난달 30일 부산의 한 시민단체가 일본 영사관 앞에 새로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한 것은 양국관계를 회복 불능 수준으로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 합의에서 일본이 요구한 소녀상 철거가 실현되기는커녕 새로운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양국 간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 게 뻔하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때그때 무엇이 장단기적 국익에 최선인가에 따라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게 외교다. 2차대전 때 서로 총구를 겨누던 미국과 일본이, 최근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더없는 맹방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유독 한국만 일본과의 관계에서 과거사에서 한발짝도 못 벗어나고 있다. 심지어 이미 정부 간 합의한 사항마저 뒤늦게 뒤집으려는 것은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치권은 마치 일본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충동질에 열중이다. 한·일 관계는 한·미 관계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물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념을 공유하는 가치동맹이다. 위안부 문제는 이미 수차에 걸쳐 사죄와 보상이 이뤄진 과거사 문제일 뿐 끊임없는 새로운 분쟁의 도화선일 수는 없다. 한번 피해자라는 사실이 존재한다고 해서 영원히 무슨 청구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대통령 업무 정지로 그렇지 않아도 외교 공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미 지난달 예정됐던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무산되기도 했다. 현 정부가 공들여 온 대중 외교는 사드를 계기로 물거품이 돼가고 있다. 대일 관계마저 소원해진다면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외톨이 신세를 면키 어렵다. 100여년 전 조선의 쇄국정책을 지금 다시 반복하겠다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