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공병우, '디지털 한글' 초석을 놓다
“공병우를 찾아라.” 1951년 부산은 전쟁 통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해군사령부에 안과의사 공병우를 찾는 긴급 수배령이 떨어졌다. 마침 동래에서 피란살이를 하던 공병우 선생이 찾아가자 손원일 해군 제독은 대뜸 타자기 얘기를 꺼냈다. 선생은 이태 전 독자적으로 한글 타자기를 개발해 놓았다. 최초의 고성능 한글 타자기였다.

타자기는 이미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주요 전략무기였다. 작전명령이 명료하게, 신속히 전달돼야 했기 때문이었다. ‘공병우 타자기’는 군수물자로 분류돼 미국에서 긴급히 제작·공수돼 왔다. 타자수를 길러내는 일도 선생의 몫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 난데없이 타자기 바람이 일었다. 해병대 사령부에 타자 강습소가 차려지고 일선 전투부대에서는 타자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국의 타자기 보급은 그렇게 군부대에서 시작됐다. 당시엔 그것이 한글 전산화를 거쳐 훗날 ‘정보기술(IT)강국 코리아’를 이끈 밑거름이 되리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공병우란 이름은 몰라도 ‘공안과’는 대부분 안다. 1938년 국내 최초로 안과 개인병원을 차린 공병우 선생은 한글 디지털화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병원 문을 연 지 얼마 안 돼 한 노신사가 환자로 찾아왔다. 의사의 길을 가던 선생에게 ‘한글 세계’를 눈뜨게 한 이 환자는 한글학자 이극로였다. 일본어로 돼 있던 시력검사표를 한글로 바꾼 이도 선생이다. 해방 뒤엔 일본어로 쓴 자신의 책 소안과학을 한글로 옮겨 일반인이 쉽게 알아보게 했다. 그는 이때 한글 타자기를 개발할 결심을 했다. 옮기는 과정에 시간이 너무 걸리고 글씨도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글학계 거목인 외솔 최현배와의 인연도 각별했다. 외솔은 문교부 편수국장을 두 차례 지내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 장려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당시 편수국장은 한글 교과서를 새로 펴내고, 우리말 순화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외솔은 전쟁 와중에서도 한글 타자기 경연대회를 열어 한글의 우수성을 알렸다.

1995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선생은 평생을 한글 과학화에 매진했다. 한글의 가치는 컴퓨터 시대에 들어 확인됐다. 70여년 전 그의 손에서 탄생한 한글 타자기는 시대를 앞서 그 소중함을 일깨운 업적이었다. 세밑인 오늘(12월30일)이 그가 태어난 지 꼭 110돌 되는 날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