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겻불을 삼킨 곁불
원로 언론인 박용규 선생은 한자와 우리말에 두루 해박했다. 은퇴한 뒤에도 집필 등을 통해 후배 기자들에게 말과 글의 소중함을 깨우쳤다. 그가 별세하기 3년 전인 2002년 초 한 지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이봐 자네, 어제 취임한 검찰총장이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그 곁불이 틀린 말 아닌가?” “누군가의 옆에 빌붙어 불을 얻어 쬐는 짓은 안 하겠다는 뜻이니 곁불이 맞잖아.” “내가 알기로는 양반 체면에 얻어 쬐지 않겠다는 불은 왕겨 같은 것을 태우는 ‘겻불’을 말하는 것 같은데….”

김대중 정부 말기인 당시는 ‘이용호 게이트’ 등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이 터질 때였다. 검찰 수사마저 권력실세들에게 휘둘린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명재 검찰총장이 취임하면서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진정한 무사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은 쬐지 않는다.” 이 얘기가 발단이었다. 박용규 선생은 그 뒤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친구가 지적한 ‘겻불’이 바른 말인 것을 알았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겻불과 곁불이 제법 알려졌지만 기자가 이 얘기를 소개한 10여년 전만 해도 그 차이를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곁불은 본래 ‘목표물 근처에 있다가 맞는 총알’이다. 어떤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는데, 가까이 있다가 당하는 재앙을 뜻한다. 옛날에는 총탄을 발사할 때 화약에 불을 댕겨 했기 때문에 총 쏘는 것을 ‘불질’이라 했다. 곁불은 여기서 생겨난 말이다.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1991년)이나 금성판 ‘국어대사전’(1995년) 등은 모두 그리 풀었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1999년)에서 ‘얻어 쬐는 불’이란 뜻으로 쓰이는 ‘곁불’을 새로 올리면서 헷갈리게 됐다. 사람들이 겻불을 잊고 곁불만 알게 된 데에는 그 영향도 큰 것 같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다.

겻불은 ‘겨를 태우는 뭉근한 불’이다. 우리 속담에 그 말이 온전히 남아 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오뉴월 겻불도 쬐다 나면 서운하다’ 같은 게 그 예다. 표준국어대사전도 속담에선 겻불로 적고 있다.

‘탄핵 사태’로 시국은 때 이르게 대선 정국으로 넘어간 느낌이다. 수많은 폴리페서가 벌써 대선 예비 후보들에게 줄을 댄다는 소식이다.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 조금은 고지식하면서도 지조 있는 지식인이 그리운 때다. 한 해를 넘기면서 새겨봐야 할 우리 속담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