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사람들이 저더러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요. 귀가 안 들리는 농인(聾人)을 위해 일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들 하죠. 그런데 실은 그런 말이 정말 싫습니다. 전 착한 사람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직업이 수화통역사일 뿐이죠.”

경력 12년차 베테랑 수화통역사인 장진석 씨(44·사진)는 지난 6일 서울 역삼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같이 말했다. 장씨는 SBS 뉴스를 8년째 통역하면서 농인 및 수화통역사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뉴스를 보는 대다수 청인(聽人) 시청자에겐 그저 ‘화면 속 동그라미 안에서 열심히 손짓하는 사람’으로 비칠 뿐이다.

“원래 TV 송출 화면의 6분의 1 크기에 맞춰서 수화통역 영상이 나와야 한다는 법적 권고사항이 있어요. 이걸 지키는 방송사는 한 군데도 없죠. 작은 화면에 맞춰서 수화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수화 크기가 작아졌어요. 음성언어에서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됩니다.”

장씨는 “내가 무슨 인권운동가도 아닌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무엇을 물어보든 차분하게 대답했다. 어떤 질문을 받든 격해지지 않았다. 농인의 정보 접근권과 수화통역사의 열악한 처우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 담담함은 오히려 당당하게 보였고, ‘낮은 목소리의 저항’으로 다가왔다.

대학에서 만난 수화, 직업이 되다

[人사이드 人터뷰] 장진석 수화통역사 "듣지 못하는 답답함보다 정보 격차가 소외감 더 키워"
장씨는 한국외국어대 미생물학과 출신이다. 가족이나 친척 중 농인은 한 명도 없다. 그런 그가 수화통역사가 된 이유는 너무나 단순했다. 대학생 때 우연히 가입한 수화 동아리에서 배운 수화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님께 수화통역사로 살겠다 했을 때 반대가 무척 심했다”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수화통역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건 생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수화로 평생 먹고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런데 수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빠져들더라고요. 학교 선배의 권유로 수화통역을 간간이 했고,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수화통역사 길로 들어섰습니다.”

방송 통역을 시작한 건 2005년 복지TV에서였다. 복지TV에서 방영하는 모든 프로그램의 통역을 맡았다. 뉴스와 드라마, 코미디와 가요 프로그램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통역해야 했다. 장씨는 “너무 다른 분야의 프로그램을 혼자서 통역해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며 “그래도 그때 경험이 통역 실력 향상엔 크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복지TV 수화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국내 방송계에서 수화통역사는 프리랜서로 여겨져요. 방송사에서 직접 뽑지 않죠. 그래서 여러 방송사에서 일합니다. 방송 수화통역 수요는 점점 늘어나는데, 수화통역사는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이죠.”

신조어, 유행어 통역은 ‘신의 영역’

2009년부터 SBS 뉴스 수화통역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SBS의 메인 뉴스인 ‘SBS 8 뉴스’를 제외한 나머지 뉴스와 속보 등을 통역한다. 장씨는 “국내 공중파 3사와 종편 방송사 중 메인 뉴스에 수화통역사를 배치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며 “농인도 청인이나 마찬가지로 각 방송사 메인 뉴스에서 무엇을 다루는지 알고 싶어 한다”며 “정보 격차에서 오는 폐쇄성과 소외 때문에 괴로워하는 농인이 많다”고 털어놨다.

“청인도 그날그날의 시사 테마에 따라 대화 주제가 달라지잖아요. 농인도 마찬가지거든요. 시사에 대해 정말 많이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방송사들의 메인 뉴스를 보고 싶어 하는 농인이 많은데, 정작 거기에 수화통역사가 배치되지 않다 보니 농인으로선 답답하죠.”

장씨는 뉴스 통역 때 뉴스 시작 30분~1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 원고를 읽으며 통역을 준비한다. 그는 “수화통역사마다 각기 스타일이 다른데 될 수 있는 한 표현을 쉽게 풀어쓰려 한다”며 “최대한 농인 입장이 돼 원고를 읽고, 그것을 수화로 옮기기 위해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교통법규 위반 문제 뉴스에서 ‘꼬리 물기’란 단어가 나왔다 칩시다. 청인은 꼬리 물기가 뭔지 단박에 알아들어요. 교차로에서 차들이 서로 먼저 가려다 보니 차들끼리 붙어 있는 모양새가 돼서 그런 말이 생긴 거잖아요. 그런데 농인에게 이걸 수화로 통역하려면 고민이 깊어져요. 저 말의 원뜻을 수화로 전하려면 ‘자동차가 계속 이어져 있는 모습’을 나타내야 하는데, 이 경우 ‘차가 막혔다’는 뜻으로도 읽힐 가능성이 있어요. 단어 그대로 ‘꼬리를 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청인은 알 수 없는 수화통역사 나름의 고충이 있습니다.”

장씨는 “최신 유행하는 신조어 통역은 수화통역사에겐 ‘신의 영역’이나 다름없다”고 토로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신조어가 엄청나게 쏟아지잖아요. 뉴스에서도 각종 시사용어가 나오고요. 이런 경우 정말 난감합니다. 예전에 어떤 농인이 제게 ‘짤방’(잘림 방지의 줄임말로 인터넷에서 글이나 동영상을 올릴 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붙이는 이미지를 가리킴)이 무슨 뜻이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저도 그 말을 그때 처음 들었거든요. 저도 모르는 유행어를 설명해 달라고 할 땐 난감합니다.”

“수화통역도 엄연한 전문직”

수화통역사의 수입을 물었다. 장씨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가 풀렸다. 그는 “한국에선 수화통역을 봉사로 생각하라는 암묵적인 강요가 있는 것 같다”며 “수화통역사는 엄연한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직 대접을 못 받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통번역대학원 출신 영어통역사는 평균 1시간에 60만원씩 받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수화통역사는 얼마 받는 줄 아세요? 건당 20만원입니다. 시간 기준으로 계산해서 주는 곳이 흔치 않습니다. 건당으로 계산한다는 건 1시간을 하든, 종일 하든 수입은 똑같다는 뜻입니다.”

장씨는 “수화통역을 그저 착한 봉사활동이라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수화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요인이라 생각한다”며 “수화통역사는 다른 언어 통역의 약 30%밖에 벌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언어를 언어로 대해야 하는데 한국에선 수화를 여전히 ‘장애인을 위한 손짓’이라고만 생각해요. 수화는 손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얼굴과 몸의 움직임, 상대방과의 감정 등이 3차원 공간에서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는 특수언어라는 점을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는 “‘열정페이’ ‘좋은 일’이란 말을 듣기 싫다”고 했다. “직업으로서의 수화 통역은 갈 길이 멀어요. 그래도 계속 이 일을 생업으로 삼을 겁니다. 프로 수화통역사가 많이 나와야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언제까지 농인을 정보 사각지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어요. 이를 위해선 농인 스스로도 더 강력하게 정보 접근권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수화통역사가 되려면, 대학 학과·청음회관 등서 교육…연 1회 국가시험
방송·회의 통역 등 점차 전문화


[人사이드 人터뷰] 장진석 수화통역사 "듣지 못하는 답답함보다 정보 격차가 소외감 더 키워"
수화통역사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다. 각종 교육 수업, 의료, 법률, 미디어, 취업 관련 상담, 종교의식, 관공서 민원과 행정 등 수화통역사가 필요한 곳은 일상의 거의 모든 영역이다.

전문 수화통역사가 되려면 한국농아인협회가 주관하는 국가공인 수화통역사 시험을 치러 자격증을 따야 한다. 만 19세 이상 내외국인에게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시험은 1년에 한 번 치러진다. 필기와 실기, 합격 후 교육과정 등 3단계로 이뤄진다. 필기시험에서는 한국어의 이해, 장애인 복지, 청각장애인의 이해, 수화통역의 기초 등 네 과목을 본다. 실기시험을 치를 땐 수화를 문자로 통역하는 필기통역, 수화를 음성언어로 통역하는 음성통역, 문자와 음성 등 여러 형태의 텍스트를 수화로 통역하는 수화통역 등 세 가지를 본다. 필기와 실기시험에 합격하면 일정 기간 연수를 받아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협회 홈페이지(slitt.deafkorea.com)에 나와 있다.

장진석 수화통역사는 “미국은 수화통역사 자격증 종류가 세분화돼 있다”며 “음악 전문 수화통역사가 따로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수화통역이 방송뿐만 아니라 회의, 행사 통역 등 여러 방면으로 전문화되는 추세”라며 “국내 수화통역 연구 수준도 과거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향상됐다”고 덧붙였다.

국내 대학 중에 수화통역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있다. 나사렛대에 수화통역학과가 있고, 한국복지대에는 수화통역과가 있다. 비전공자들이 수화를 배우는 곳으로는 고(故) 운보 김기창 화백이 서울 역삼동에 세운 청음회관이 있고, 한국농아인협회에서도 자체 교육 과정을 운영 중이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