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에고, 죄송합니다. 제가 명함이 없어요. 백수라서요.”

의외였다.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고 독일어, 라틴어 독해가 가능한 언어 천재’ ‘세계문화전문가’란 타이틀로 유명한 조승연 씨(35)는 너무나 태연하게 자신에 대해 “난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낸 신간 《플루언트》를 비롯해 《이야기 인문학》 《공부기술》 등의 베스트셀러 19권을 출간한 작가이자 EBS ‘세계테마기행’, tvN ‘비밀독서단’ 등 각종 방송 출연자로서 상상했던 ‘특유의 지성미를 자랑할 것 같은 남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평소에 이렇게 머리 스타일에 힘을 주거나, 옷을 잘 챙겨 입거나 하지 않아요. 제가 연예인 같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고요. 그저 운이 좋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인문학으로 장사하는 사람’이란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아요. 어학 공부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난 11월14일 서울 목동 SBS사옥 로비에서 한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젊은 학문 방랑자’의 삶 택하다

강원 원주에서 태어난 조씨는 “어린 시절 왕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왠지 모르겠지만 당시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며 “미국에서 공부하게 된 것도 그런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진 건 어머니 이정숙 에듀테이너그룹 대표 겸 유쾌한대화연구소 대표가 1993년 미국 어학연수를 떠날 때 따라가면서다. KBS 아나운서 출신인 이 대표는 당시 회사 지원으로 단기 연수를 가면서 아들 조씨를 데려갔다. 이 대표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조씨는 미국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내가 꿈꿨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며 “아무도 내게 ‘뭐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 따윈 하지 않았기에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뉴욕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대학원 석·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려던 조씨의 꿈은 1997년 외환위기로 물거품이 됐다. 외환위기 여파로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학과 대학원은 학비가 정말 많이 들어요. 아무리 아르바이트나 인턴십을 한다 해도 그 비용을 홀로 감당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집에서 송금도 끊기고, 가진 돈이 200만원밖에 남지 않았을 때 프랑스 루브르대로 향했어요. 거긴 대학원 진학 때 학비가 거의 들지 않으니까요.”

조씨는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서 비교언어문학 분야를 전공했다. 원래 관심이 많았던 어학 공부가 천직이 된 순간이었다. 그는 “낯선 언어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워낙 강했다”며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라틴어를 공부했고, 유럽어권 언어로서 독일어도 공부했다”고 말했다.

“굳이 저에 대해 스스로 정의하자면 방랑자라고 말하고 싶어요. 학문의 세계를 떠도는 방랑자요. 그저 알고 싶어서, 외국어와 그 문화란 커다란 산을 탐험하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이 저를 늘 공부하게 하거든요.”

‘결핍과 계기’ 없인 공부할 수 없어

[人사이드 人터뷰] 영어를 '계급'으로 아는 한국 사회, 언어는 세상 만나는 수단일 뿐…
조씨는 “외국어를 공부할 때는 ‘결핍’과 ‘자신만의 계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외국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경험한 적이 없고, 어학 공부를 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 어학을 익힐 원동력을 얻지 못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그게 중요하다는 걸 알려준 사람은 어머니”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방임과 통제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잘 아는 분이었어요. 하루는 미국에 있을 때 어머니가 ‘너 중고차 좀 사 봐’라고 했어요. 자동차 정보를 모으고, 딜러를 찾고, 관련 용어를 뒤지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어머니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활 영어를 해야 기본적으로 살 수 있다는 걸 배웠죠.”

1993년 미국으로 떠났던 조씨는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국 프랑스 등 해외에서 겪은 문화적 충격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겪은 문화적 충격이 훨씬 컸다”고 털어놨다. “1993년의 한국과 2011년의 한국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빠르게 변화하는 나라인데 20년 가까이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왔잖아요. 제 머릿속 한국은 1993년인데, 돌아와서 마주친 한국은 2011년이었죠. 그때의 낯선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예로 든 것은 주택과 가정 문화의 변화였다. “전 원주에서 컸거든요. 원주에서도 시내와는 좀 떨어진 곳에 살았어요. 단독주택에 살았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다 보니 나가서 놀거나 책을 읽는 등 제가 저만의 일상을 꾸리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아파트 중심 문화로 바뀌어 있었어요. 집집마다 서로 닫힌 채로 가정 내에서 자녀를 과보호한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조씨는 “부모가 자녀에게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뭐든지 다 해주면 아이들은 자생력을 잃는다”며 “자생력을 잃으면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도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몰라도 부모가 먼저 나서서 ‘네가 안 해도 돼’라고 한다면 아이가 그걸 보고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며 일자리 시장으로 나와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현재 한국에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외국어는 어디서든 세계를 보는 힘”

그는 “영어는 ‘계급’이 아니고 ‘취업을 위한 스펙’은 더더욱 아니다”며 “언제 어디서든 넓은 세계를 보여 주는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는 언어로서 영어를 익혀야 하는데 한국에선 아직 그렇지 못한 환경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지구촌 곳곳의 자료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세상이 됐어요. 그저 한국이란 좁은 공간만 바라보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학교에서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가 어떤 식으로 교육되는지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에선 여전히 영어를 계급으로 봐요. 그러니 영어라고 하면 모두 질려 버리죠.”

조씨는 “영어 자체를 계급 상승 혹은 취직을 위한 공부라고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영어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넓은 무대에서 하기 위한 기능적 역할을 하는 언어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영어를 공부하면 각종 분야에서 한국에선 접하지 못할 수많은 자료를 만날 수 있다”며 “아직도 ‘영어를 어디 써먹을 데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너무 좁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공부하면 각자 하고 싶은 분야를 좀 더 넓고 깊게 개척하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세계가 한 손에 들어오는 세상이 됐잖아요. 이 새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유영하도록 돕고 싶은 게 저의 소망입니다.”

[조승연 씨가 전하는 효과적 외국어 학습법]
아이 눈높이로 낮춰 말하는 '토킹 다운'은 역효과

자녀의 어휘력 향상을 방해하는 요인


조승연 씨는 영어를 비롯한 각종 외국어를 효과적으로 학습하기 위해서는 “언어는 소통을 위해 존재하고, 언제나 유기적으로 흐르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시험지와 대화하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다국어를 구사하는 건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을 갖고 소통하려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녀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부모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부모가 아이 눈높이에 맞춰 말하는 ‘토킹 다운(talking down)’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조씨는 “토킹 다운이란 부모가 자녀 앞에서 부모 수준의 어휘를 구사하지 않고, 아이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아이 수준의 어휘만을 써서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며 “이게 자녀의 어휘력 향상을 가장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부모의 과보호가 낳은 부작용입니다. 부모는 아이와 더 쉽게 말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겠지만, 아이로선 부모의 세계를 알 기회를 놓친 셈이거든요. 사실 이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문제로 떠오르는 테마입니다.”

그는 부모와 함께 AFKN과 영어 서적, 신문을 읽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자녀로 하여금 ‘우리 엄마 아빠의 단어 실력과 관심 주제를 쫓아가지 못하면 난 대화에 낄 수 없겠구나’란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이들은 일단 부모가 길을 터 주면, 부모와 대등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매우 빠른 속도로 언어를 학습한다”며 “부모의 과잉 보호가 오히려 어린 자녀들의 공부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자녀들의 학습 의지를 꺾는 결과를 낳는다”고 덧붙였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