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업이 러시아 투자를 늘리고 있다. 고급 승용차 벤츠를 생산하는 다임러, 세탁 세제를 만드는 헨켈 등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폭락해 중국보다 인건비가 싸졌고, 앞으로 경기 회복이 예상돼 러시아 사업 전망이 밝다는 이유에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연합(EU)이 대(對)러시아 경제제재를 연장할 가능성이 높지만 독일 기업은 아랑곳없이 러시아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9일 보도했다.
미국·EU 제재에도…독일 기업들, 러시아로 '러시'
◆2008년 이후 최대 규모 투자

독일 중앙은행에 따르면 독일 기업이 올 들어 9월까지 러시아에 직접투자한 금액은 20억5000만유로(약 2조5000억원)에 달했다. 작년 한 해 직접투자액(17억7700만유로)을 넘어섰고 35억4300만유로를 기록한 2008년 이후 최대 규모다. 직접투자는 현지에 공장을 설립하거나 지분을 취득해 현지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투자를 말한다.

헨켈은 3000만유로(약 370억원)를 투입해 지난 6월 러시아 내륙도시 페름에 세제 생산공장을 세웠다. 지난 8일에는 모스크바 인근 노긴스크에 있는 뷰티케어 공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한다고 발표했다. 샴푸와 염색제, 샤워젤 등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세르게이 비코프스키 헨켈러시아 사장은 “공장을 인수하고 3년 동안 생산량을 네 배가량 늘렸지만 수요를 맞추기엔 역부족이었다”며 “이번 확장은 러시아 시장의 장기적 전망을 밝게 보고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폭스바겐은 지난달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티구안’을 생산하는 공장을 모스크바 남서쪽 칼루가에서 가동했다. 1억8000만유로(약 2200억원)를 투자했다. 다임러는 3억유로(약 3700억원)를 들여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을 세우는 방안을 러시아 정부와 협의 중이다. 러시아 현지 언론은 이르면 올해가 가기 전에 투자계약이 성사될 수 있다고 전했다.

◆값싼 인건비·정부혜택 등이 유인

6월 3500만유로(약 430억원)를 투자해 노긴스크에 공장을 세운 독일 펌프회사 윌로의 올리버 에머메스 최고경영자(CEO)는 “지금 러시아에는 기업이 투자할 만한 이유가 많다”고 말했다.

우선 값싼 인건비가 꼽힌다. 미국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에 따르면 러시아 노동자의 평균 월급 수준은 7월 기준 508달러로 중국(764.3달러), 멕시코(636.6달러)보다 낮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 이후 가해진 미국과 EU의 경제제재와 원유 가격 하락에 러시아에 경기 침체가 닥친 탓이다. 루블화 가치가 1년 새 40% 넘게 폭락하면서 작년 월평균 임금 839.7달러에서 큰 폭으로 하락했다.

러시아 우랄십캐피털의 드미트리 더드킨 채권리서치 팀장은 “중국이 고성장하고 유가 회복이 더디다면 러시아 인건비가 중국보다 싼 상황이 긴 시간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3.7%를 기록한 뒤 올해(-0.8% 전망) 반등하고 내년 1.1%, 2018년에는 1.5%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점도 기업이 기대를 거는 부분이다. WSJ는 “(러시아에 유화적인)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 경제제재 등이 완화될 것이란 희망도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인구가 1억4400만명에 이른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루블화가 폭락하기 전인 2013년 1만5000달러를 넘어 경제만 살아나면 상당한 수요가 창출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 정부도 각종 혜택을 제시하며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외국 기업이 러시아에 7억5000만루블(약 138억원) 이상 투자할 것을 약속하면 정부 사업 입찰 시 러시아 기업과 똑같이 대우하고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식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