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잠시 예술가가 돼 보는 자유로움을
오페라 작곡가 하면 떠오르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이렇게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자코모 푸치니가 유독 생각난다. 12월 크리스마스이브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 ‘라 보엠’ 때문이다. 라 보엠은 프랑스 파리의 라틴구역 낡은 다락방을 아지트 삼아 지내는 시인, 화가, 음악가, 철학자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예술가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멋과 희망으로 자신들의 청춘을 가득 채우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그중 주인공인 시인 로돌포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친구들이 우연하게 생긴 돈을 나눠 쓰려고 크리스마스이브에 멋진 식당을 찾아간 사이, 낡은 다락방에 미미라는 여인이 불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다. 이 둘은 촛불을 나눈다. 로돌포는 여인의 찬 손을 녹여 주며 가난한 시인의 풍요로운 마음을 이야기한다. 미미도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을 맞을 것이라는 희망, 푸른 하늘과 향기로운 꽃을 좋아하는 마음을 노래한다. 다소 진부한 설정이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낭만적인 만남으로 봐줄 수 있다.

여기에 화가 마르첼로도 옛사랑과 재회하며 친구들과 함께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가난은 사랑마저 흔들어 놓고 만다. 병을 앓고 있는 미미를 돌봐주지 못해 이제 이렇게 추운 겨울에 이별을 결심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은 왔지만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만 남는다. 네 명의 예술가는 변함없이 유쾌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미미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들의 다락방에 찾아온다. 그러고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친구들과 옛 애인을 만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친구들은 안타까운 로돌포와 미미의 만남을 보고 외투를 팔고, 장신구를 팔아 의사를 불러주고 약을 산다. 결국 미미는 로돌포의 다락방에서 죽음을 맞고 시인 로돌포는 오열하며 막이 내린다.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이 오페라를 감상하고 있자면 여지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한다. 음악적으로 푸치니의 아름다운 선율이 연주되고 극적으로 안타까운 죽음이 마지막에 배치돼 그럴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오페라 전편을 통해 보여주는 친구들의 우정과 젊은 예술가의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마지막의 죽음이 진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마음속에 여러 번의 촛불을 켜고, 끄고, 설레는 사랑을 나누고, 이별하는 경험을 한다.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생활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때로는 무심한 듯 잊고 있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 보면 후회가 남기도 하고 때로는 싱긋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우리도 한 번쯤은 예술가 같은 삶을 살아 본 것은 아니었던가?

악보를 보면 페르마타(fermata)라는 새의 눈 모양을 한 음악 부호를 자주 만난다. 정확하게 명시되지는 않지만 그 음의 길이보다 두 배 이상 늘여서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연주자마다 그 길이는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로 ‘정류장’을 뜻하기도 한다. 연말이 되면서 평소와 똑같이 보내던 시간이 더욱 빨리 가는 느낌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몸과 마음이 많이 분주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때 문득 정거장에서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여유로움으로, 같은 시간이지만 두세 배 길게 호흡하는 기분으로 푸치니의 ‘라 보엠’을 틀고 잠시 예술가가 돼보는 자유로움을 누려보면 어떨까? 바쁘고 정신없는 연말이지만 말이다.

이경재 < 오페라연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