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AI, 우리말에 숙제를 던지다
“조류독감이라 하지 말고 조류인플루엔자라고 써 주세요.” 국내 대표적 닭고기 외식업체인 제너시스BBQ의 윤홍근 회장은 2005년 11월 ‘조류독감’과의 싸움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것은 용어와의 싸움이었다. 관련 산업 협회장을 맡아 언론사 등을 찾아 업계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조류독감이라는 말이 사람이 걸리는 독감을 연상케 해 닭고기, 오리고기 소비 위축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에이아이’라는 게 있다. 갑자기 들이대면 좀 낯선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영문자로 AI라고 하면 대부분 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불청객, 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를 뜻하는 말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관련 농가의 시름을 더욱 깊게 하는 주범이기도 하다.

국내에 이 말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7년께다. 당시엔 인체 영향 등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 보도돼 관련 산업에 타격을 줬다. 정부는 민간협회 등과 함께 조류독감이란 말 대신 조류인플루엔자 또는 AI로 써줄 것을 언론에 요청했다. 일종의 완곡어법이었다. 사전에서는 양상이 다르다. 조류인플루엔자를 조류독감으로 순화했다. 외래말을 순화할 때는 기왕이면 바꾼 말을 쓰라는 뜻이다. ‘국어의 관점’에서 본 말과 ‘산업적 관점’에서의 현실적 요구가 충돌하는 셈이다. 이제 사전에서 ‘조류독감’이란 말을 빼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에이아이’라고 하면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낯익은 게 있다. 인공지능을 뜻하는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그것이다. 지난봄 펼쳐진 이세돌 프로바둑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 간 대결에서 AI는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말 역시 그 존재감을 알린 지 꽤 됐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AI’가 계기다. 2001년 국내에서도 개봉돼 인기를 끌면서 AI를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인공지능으로서의 ‘에이아이’는 사전에도 올라 있다. 이미 단어의 지위를 얻었다. 조류독감과 조류인플루엔자, 인공지능, 그들을 두루 가리키는 AI가 서로 ‘언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꼴이다.

IC(인터체인지) 자리를 어느새 나들목이 대신하고, 주유소에서 “만땅”을 외치던 사람들이 지금은 “가득”이라고 주문한다. 넘쳐나는 영문 약어를 줄이려면 자연스럽고 맛깔스런 우리말을 많이 찾아내야 한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