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청문회 이후] "정경유착 끊자"는 청문회서…기업에 '지역구 민원' 압박한 의원들
“미국 애플은 테러범의 휴대전화(아이폰) 잠금장치를 풀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시민의 자유가 파괴될 수 있다며 당당히 맞섰습니다. 우리 기업은 왜 부당한 압력에 굴복합니까.”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6일 열린 국회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증인석에 앉아 있는 대기업 총수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청문회 동료 의원들은 하 의원의 질문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 몇 시간 뒤 직접 보여줬다.

이용주 국민의당 의원은 대기업의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출연 문제를 거론하다가 갑자기 “여수에 롯데케미칼이 있는데, 여수 내 넘버투(2위) 정도 규모”라며 “그런데 그에 걸맞은 기여를 하지 않아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못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의 지역구는 전남 여수갑이다. 그는 “제일모직(현 삼성물산)도 매각되기 전까지 여수에 계속 있었지만 큰 사회사업을 한 적이 없다”며 “그래서 좋은 평가를 못 받았다”고 말했다. 증인석에는 ‘규모에 걸맞은 기여를 하지 않은’ 기업의 총수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앉아 있었다.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은 이 부회장에게 “구미에서 삼성전자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다가 베트남으로 이전했다”며 “베트남에 투자한 금액 3분의 1만 구미나 한국으로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년부터는 외국 투자보다는 국내 투자를 확실하게 늘리겠다는 각오의 말을 해달라”고 압박했다. 이 의원의 지역구는 경북 고령·성주·칠곡이다. 이 지역은 경북 구미와 붙어 있다.

이날 청문회는 청와대를 등에 업은 최순실이 기업에서 돈을 뜯었다는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열렸다. 이완영 의원을 비롯한 많은 의원은 청문회 내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며 기업 총수들을 질책했다. 그러다 국민의 관심이 줄어드는 밤이 되자 일부 의원이 슬며시 지역구 민원을 내민 것이다. 국회 복도에 설치된 TV를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던 기업 관계자들은 “최순실과 다를 게 뭐냐”고 수군거렸다.

반(半)강제성 준조세를 폐지하고 그 액수에 상당하는 법인세를 인상하면 찬성하겠느냐는 하태경 의원의 질문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그런 효과가 나면 찬성이지만 지금 말한 게 이뤄지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국내 대표 기업인들을 한데 모아놓고 경영 비(非)전문가인 국회의원들이 호통 치는 장면 자체가 일종의 ‘갑질’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정경유착 의혹과 무관한 망신주기식 질문을 하고 “똑바로 하라”고 무안을 주는 장면이 세계 곳곳에 퍼지면 그 피해는 기업이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어서다. 중국의 환구시보가 “한국 정치 스캔들이 경제에 타격을 줄까 우려된다”고 걱정할 정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 기업 총수들이 닦달당했다(grilled)”고 보도했다. 박중흠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은 7일 삼성 수요사장단 회의에 들어가면서 “기업할 맛이 안 난다”고 한탄했다.

한 기업인은 “정치인들은 앞에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뒤에선 기업에 손을 벌린다”며 “기업을 ‘현금지급기’나 ‘민원 창구’, ‘영원한 을(乙)’로 생각하는 정치인이 사라지지 않으면 이런 청문회는 언제고 다시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조만간 롯데가 여수에 문화시설을 하나 짓겠다”는 자조 섞인 전망도 나왔다.

이재용 부회장은 마무리 발언을 하면서 “구태를 다 버리고 정경유착이 있다면 다 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빈말이라도 “우리도 기업에 손 벌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정치인은 한 명도 없었다.

도병욱 산업부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