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잠룡들의 '와각지쟁(蝸角之爭)'
와각지쟁(蝸角之爭).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운다는 뜻이다. 좁은 공간에서 하찮은 일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 마음이 졸아들 때 이 구절을 암송하며 용기를 냈다고 한다. 눈앞의 작은 다툼을 경계하고 호방하게 큰일을 도모하는 지침으로 삼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이후 여야 대선주자들의 행보가 엇갈린다. 지리멸렬한 새누리당 주자들은 언급할 상황조차 안 된다. 물론 위기의 진원지는 청와대다. 집권여당도 난국을 수습할 책무를 떠안았지만 그 일을 해낼 만한 지도자는 당내에서 전혀 안 보인다.

김무성 전 대표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박 대통령 공격에 앞장서고 있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탈당해 버렸고, 나머지 잠룡들은 사태를 수습할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여권의 ‘구세주’로 꼽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새누리당으로 올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대통령 탄핵안이 9일 국회에서 처리되고 새누리당 비박계가 탈당한다면 집권여당이 유력 대선주자를 못 내는 초유의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대선판이 야당에 유리해지면서 야권 주자들은 바빠졌다. 최순실 사태 이후 야당 잠룡들은 연일 발언 강도를 높이고 있다. ‘혁명’ ‘재벌해체’ 등 선동적 언어까지 쏟아내고 있다.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언사로 지지율이 오르고, 그에 영향받은 다른 주자들이 더 자극적인 발언을 내놓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경각에 달린 경제와 미래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다. 소비심리는 위축되고, 수출액은 2년 연속 감소했음에도 경제에 대해선 귀를 막고 선명성 경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뜨고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 간 ‘고구마-사이다’ 논쟁은 가관이다. 문 전 대표가 “이재명은 사이다, 문재인은 고구마”라고 말한 게 발단이 됐다. 고구마는 배를 채울 수 있지만 사이다는 음료수일 뿐이라는 의미다. 이 시장의 인기는 한때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마든, 사이다든 주식(主食)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문 전 대표는 ‘대통령 국군통수권 회수’, ‘탄핵안 가결 뒤 대통령 즉각 퇴진’ 등 초법적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다른 주자들이 치고 올라오기 전 조기 대선을 하는 게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발언이다. ‘권력욕’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순실 사태가 매우 엄중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대선주자들이 메시지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걸 기화로 경쟁을 벌이는 이들의 행태는 ‘와각지쟁’과 다름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나라를 성장시킬지에 관한 큰 그림은 없다. 난국을 헤쳐나갈 로드맵과 비전도 없이 눈앞의 대선 유·불리만 따지고 있다.

거리 민심은 결과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이를 잘 소화해 현실성과 접목해야 할 책무는 정치인에게 있다. 나라를 이끌겠다는 잠룡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들은 그저 촛불만 쫓아갈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수습책과 대안을 논의하기보다 목표 없이 총만 이리저리 난사할 뿐이다. 다음 5년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