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가장 나쁜 자들은 이 시대 정치인들이오"
기업 총수들이 ‘최순실 게이트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른 6일, 지인들과의 저녁모임은 우국(憂國)토론장이 됐다.

“세계에서 의회가 청문회를 하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인데, 우리나라가 껍데기만 들여왔다. 영어로는 청문회가 ‘듣는다’는 뜻의 ‘히어링(hearing)’인데,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샤우팅(shouting)’으로 일관하는 후배 의원들을 보면서 씁쓸했다.”(원로정치인) “기업들의 경쟁력이 다 무너졌다. 국회의원들이 ‘한국 간판 기업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사업한다’고 전 세계에 나팔을 불어댔다. 정치권력에 돈을 뜯겨 망신당하는 것도 황당한데.”(중견기업인)

국회의원들은 9명의 대기업 총수를 불러다가 ‘청문(聽聞)’이 아니라 ‘추궁(追窮)’회를 열었다. 차분하게 경청할 생각은 아예 없어 보였다. 미리 정해놓은 결론을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였을 뿐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불러 앉혀놓았지만 대부분 시간은 몰아붙이고, 쏘아붙이고, 빈정대는 국회의원들의 몫이었다. 9명의 총수에게 주어진 발언시간은 다 합쳐도 한 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단답으로 답변해달라” “네, 아니요로 말하라”고 다그쳤다. 상황 설명을 하려면 말을 끊고, 다음 질문으로 닦달했다. 무례하고 거친 표현으로 정치적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경쟁에는 여야가 없었다. 첫 질문자였던 장제원 새누리당 의원부터 “정유라에게 상납하고…” “비선실세만 쫓아다니고…” 따위의 표현으로 기업인을 모욕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을 넘어, 급변하는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속자생존(速者生存)의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글로벌 경쟁 현장을 챙기기에도 벅찬 기업인들이 국내 권력자들에게 돈을 뜯겨야 했다면, 왜 그랬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먼저 살피는 게 마땅한 순서다. 법을 만들고 국정을 감시하는 국회의원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지만, 립 서비스 수준의 반성조차 없었다.

오히려 “대기업들이 외국에 투자한 돈의 3분의 1만 한국으로 옮기면 취업문제가 해결된다”는 등의 수준 낮은 주장을 늘어놓았다. 수도권 규제, 유통점포 출점규제, 파견직 규제 등으로 기업들 발목을 묶어 기업을 해외로 내몰고, 일자리를 틀어막고 있는 당사자가 국회인데도 말이다.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국회의원들에게 ‘해야 할 일’을 일깨워 주는 총수들도 있었다. 구본무 LG 회장은 “국회에서 입법을 해서 (준조세를) 막아달라”고 했고, 신동빈 롯데 회장은 “(일자리 창출 효과가 가장 큰) 쇼핑센터를 더 짓고 싶어도 출점규제 때문에 못한다. 규제를 완화하면 좋은 일자리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국회의원들이 이런 말을 귀담아듣고, 의정(議政)에 반영하는 게 ‘청문회’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는 것임을 새기기 바란다.

한국 사회는 지금 국정의 중심축이 실종된 미증유의 위기에 빠져 있다. 대통령은 국정 농단 논란에 휘말려 식물상태가 됐고, 국회는 청문회에서 확인했듯이 광장의 ‘촛불 민심’ 눈치보기에 급급한 선동정치꾼들의 무대가 돼 버렸다. 이번 주말도 어김없이 촛불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정치권은 ‘돌아올 다리를 불사른 채’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이고 있다.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칠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오리무중이다.

광장의 분노를 다독이기보다는 되레 편승하고 부채질하면서, 권력장악만을 셈하기에 바쁜 정치인들을 향해 소셜사이트에 올려놓은 ‘80대 노인’의 글이 가슴 속을 파고든다. “일제와 해방과 전쟁을 온몸으로 살아온 나는 ‘죽여라, 처단하라’ 악쓰는 자들은 절대 믿지 않소. 인간에 대한 연민과 예의, 용서가 없는 단죄는 또 다른 악(惡)을 불러올 뿐이오. 가장 나쁜 자들은 이 시대 정치인들이오. 나라가 이 지경 되는 데 일조했거나 방관한 자들이 내 탓이라 엎드려 울진 않고, 호시탐탐 권력만 파고들 궁리라니요. 그것이 민주주의라면 나는 반대요.”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