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결자해지를…당장 내려온다 말하라"
이 글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입니다.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분에게 위로의 말 대신 듣기에 매우 고통스러울 말을 전하려니 내 마음도 편치가 않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서자(庶子)’만도 못한 처지가 돼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는, 부르기 싫은, 부르기 부끄러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집단 우울증을 넘어선 억눌린 분노가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시민 혁명’이란 말이 군중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은 세 차례의 대국민담화를 통해 ‘사과’와 ‘용서’, ‘마음을 비웠다’를 되풀이했지만 이 말들은 국민에게로 가 닿지 못하고 깃털처럼 허공에 흩뿌려졌습니다. 국민은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국민이 야속하겠지만, 진심은 진심일 때 비로소 진심인 법입니다. 국민 96%는 대통령의 담화에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을) ‘비웠다’는 ‘아직 안 비웠다’, ‘내려놓겠다’는 ‘내려놓을 수 없다’의 반어적 표현으로 읽혔습니다.

점입가경입니다. 대통령의 메시지와 태도, 상황 인식은 국민의 울분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북돋고 있습니다. 본인의 잘못을 대통령 당신만 모른다는 데서 국민은 불신을 넘어 절망에 빠집니다. 입에 담기 힘든 조롱과 비아냥도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의 실정(失政), 그 핵심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측근이 국정을 농단하며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데 있건만, 정작 대통령 자신은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검사 수사와 탄핵 과정에서 따지고 소명해 잘잘못과 시비를 가리면 됩니다. 그런데도 국민을 상대로 변명을 하려 드니 처량해지고 궁지에 몰릴 따름입니다.

당신은 국격을 추락시키고 온 국민을 수치스럽게 했습니다. 피땀 흘려 쌓아올린 나라의 위상이 한순간에 아프리카 후진국 수준으로 무너졌습니다. 3류 국가, 4류 국민이나 다름없는 행태를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 당신 이름을 팔아 버젓이 자행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나 간여 여부는 추후 밝혀지겠지만, 직위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광장으로 모여든 국민의 함성, 심각한 국론 분열, 국정 마비, 추락하는 경제, 손발이 묶인 정부와 공무원…, 그 모든 책임의 근원이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마땅합니다.

천막 당사 세우던 그 마음으로

막상 펜을 드니 옛일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당신은 무너져 내리던 한나라당 대표가 돼 천막 당사로 이사하면서 나를 사무총장 겸 선거대책본부장으로 기용했습니다. 세 차례나 고사했지만 네 번째 부탁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천막 당사에 도착한 국회 선배이며 나이도 위인 나는 당신께 이런 첫인사를 했습니다.

“인당수에 뛰어내리는 심청이 되십시오. 그럼 나는 뒤이어 바로 뛰어내리겠습니다. 그 길만이 거친 풍파에 침몰하는 한나라당호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날 이후 당신은 끼니를 건너뛰며 밤늦도록 전국을 누볐습니다. “(한나라당을) 더 때려 주십시오, 더 반성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목숨만은 제발 끊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천막 당사에 근무하던 유일한 현역 의원인 나는 애초 1주일에 한 번만 지역구에서 상경해도 좋다는 당신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비행기를 네 번 탄 날도 있을 만큼 김포공항과 김해공항 사이를 오가며 내 선거를 포기하다시피 하며 당무에 매달렸습니다. 예상을 뒤엎고 121석의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천막 정신’이란 신조어와 함께 보수 정당의 새로운 희망을 열었습니다.

그 뒤 염창동 창고 당사로 옮기며 340명의 사무처 직원을 200명으로 줄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아 총장인 내가 악역을 맡았습니다. 나는 맨 먼저 당신이 아끼는 보좌역부터 옷을 벗겼습니다. 당신은 받아들였습니다. 작업의 실무자였던 국장과 과장도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조직은 죽음으로써 살아났습니다. 당시 기꺼이 몸을 던져 당과 동료를 구한 그들의 위대한 희생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박 대통령, 결자해지를…당장 내려온다 말하라"
그렇습니다. 내가 알던 당신,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박근혜의 잔상은 현재의 이런 모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신의 애국심, 나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한결같으리라 믿었건만 지금은 그마저도 허망하고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합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새누리당 비주류 40여명이 당신의 입장 표명과 별개로 탄핵에 동참키로 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당사가 점령되다시피 한 대규모 새누리당 해산 촉구 시위가 견인차였습니다. 당신의 계산보다 이번에도 시위대의 행동이 더 빨랐습니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의결된다면 헌법재판소 앞도 탄핵 심판 결정을 최대한 당기라는 성난 민심의 촛불과 함성으로 뒤덮일 것 같습니다.

이제 탄핵은 불가피해졌습니다. 탄핵 이후가 우려스럽기만 합니다. 광화문 시위에서 촉발된 일종의 혁명적 상황이 어떻게 귀결될 것이며 그 종착점은 어디일지 대강 그림이 그려집니다. 안타깝고 우울합니다. 법에 의한 대통령직 박탈보다는 국민의 뜻을 받든 자진 하야가 그나마 낫다는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건만 더 나쁜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또한 자리에 집착하는 속내를 보인 당신의 자업자득입니다.(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 시절, 나는 탄핵에 반대해 서명 발의하지 않은 몇몇 사람 중에 속했습니다.)

대통령직은 최고최종의 책임자 자리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계속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책임 정치가 실종되고 기회마저 놓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거취 문제까지 그렇게 비난하던 국회가 결정해 달라며 떠넘겨 지도자에 대한 마지막 신뢰마저 무너졌습니다.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새누리당이 사분오열되고 흔들리는 것도 당신이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당 지도자들이 손바닥 뒤집듯 말을 번복하며 연일 강공으로 몰아쳐대는 것도 당신의 신뢰를 잃은 태도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곧장 탄핵이 의결되면 당신은 직무 정지되고 현 내각이 정부를 이끌어야 합니다. 국무총리부총리, 몇몇 장관 등은 당신의 실책으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국정 수행에 지장을 받을 만큼 약체 내각이 됐습니다. 이런 내각이 가장 중대한 향후 수개월간 나라를 이끌어 가도록 방치한 것은 당신과 야당의 공동 책임이 될 것입니다. 특히 당신의 책임이 큽니다. 지도자의 실기(失機)가 본인은 물론 나라에 엄청난 손해를 끼친다는 것을 이 이상 보여줄 수가 있을까요.

비극이 시작될 판…이것은 막아야

단임 대통령들의 추락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이 헌법하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러나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당신은 정치공학적 계산에 의한 국면 호도용 개헌 카드를 꺼냄으로써 개헌은 물 건너가게 생겼습니다. 현행 헌법하에서 차기 대선을 그대로 치른다면 당신에 이은 ‘제왕(帝王)의 추락’을 또다시 보게 될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러면 국민은 시대를 읽지 못한 지도자의 부덕으로 다시금 괴로움을 당하겠지요.

나라가 걱정입니다. 인간의 목숨이 유한하듯이 나라도 생명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수명이 다한 건가요.

요사이 당신으로 인해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한국 정치의 한 축으로 사실상 우리 정치를 이끌어 왔던 보수 정당이 당신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였습니다. 보수가 망하는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가뜩이나 단선적 사고가 지배해온 한국 정치가 더욱더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방향으로 흘러갈까 두렵습니다. 보수로 대변되던 새누리당의 간판을 내리고 안 내리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영 논리에 매몰된 기존 정당들을 오래전부터 비판해온 사람으로서 케케묵은 안보론 대 종북론, 성장 대 분배라는 이분법적 대립, 한물간 저차원적 논쟁이 한 방향으로 쏠리게 될 것 같아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완장 차고 행세하는 무리에 의해 사고의 다양성과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토론 및 대화가 실종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평소 대화를 않고 소통을 기피하던 당신, 보수의 아이콘이던 당신의 마지막 행태로 이 땅에서 비극이 시작될 판입니다. 이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아직도 가장 중요한 열쇠는 당신이 쥐고 있습니다. 결자해지하십시오. 비극을 막기 위해 국민에 대한 당신의 마지막 충성, 애국심을 발휘해 주십시오. 시간은 당신의 편이 아닙니다.

주말의 광화문 시위가 갈수록 거세지며 세계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촛불이 횃불 되고 들불 된다더니 드디어 횃불까지 등장했습니다. 4·19에서 6·10 항쟁, 광우병 시위까지를 현장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우려를 감출 수 없습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이성과 합리와 온건이 주도하는 시위도 시간이 흐르면 선동과 폭력이 개입할 요소가 높아집니다. 일부 보수 세력의 과격한 반동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형국이 될 수 있습니다.

국회는 가뜩이나 기능을 잃고 성난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대중의 분출되는 욕구를 쓸어 담아 실현시키고 질서 있게 제도화하는 것이 정치권의 몫입니다. 분위기에 편승해 불을 지르기는 쉬워도 주워담고 수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치권 인사, 특히 차기 대권 주자들이 지금처럼 쉬운 길만 찾으려 한다면 나라는 혼미 상태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 절망의 현실을 희망으로 바꾸고, 대한민국이 새롭게 태어나는 기회로 삼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거듭 고언하고 호소합니다. 당신의 애국심으로 나라를 위한 마지막 선택을 해주십시오. 당신 아버지가 힘들게 근대화산업화한 이 나라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경제적사회적외교안보적, 그 모든 파탄이 당신 때문에, 자리에 연연하는 그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믿고 싶지는 않지만 오직 퇴임 후 교도소에 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시간을 끌며 반전을 노리는 것으로 비친다면 당신과 국민, 우리의 공동체인 이 국가는 더욱 불행해지고 마침내는 난파되고 말 것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길이 열립니다

“내가 죄인이다. 이 자리에서 당장 내려오겠다. 국정에서 완전히 손 떼겠다. 다만 정리할 최소한의 기간만 달라. 감옥 아니라 더한 곳도 국민이 가라는 곳이면 기꺼이 가겠다.” 이런 말을 듣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선언하십시오. 그러면 국회에서 탄핵이 잠시 연기되고 최소한 거국·과도의 새 내각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탄핵의 심판을 받으십시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고 마지막 애국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길이 열립니다. 지금 우리는 나쁜 길로 가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없고 내각도 부실하며 모든 것이 불확실한 아노미(anomie) 상태를 이대로 놔둔 채 이해득실만 따지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과 국회가 역사적 잘못을 저지르는 현장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부 고발자의 심경으로 지적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후 저에게도 수많은 돌팔매가 날아올 줄 압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에는 저 같은 은퇴 정치인들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달게 받겠습니다.

요즘처럼 태극기를 보면 뭉클하고 애국가가 가슴을 울린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나님, 이 나라를 굽어살피소서.

김형오 < 전 국회의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