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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민주공화국의 '오적'

입력 2016-11-29 17:46:25 | 수정 2016-11-30 01:05:53 | 지면정보 2016-11-30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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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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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는 담시 오적에서 맹렬한 언어로 ‘다섯 도적’을 고발했다. 1970년의 일이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 그가 꼽은 오적이다. 시인의 외침은 큰 울림과 운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현실은 더 팍팍해졌다. 반백년 지난 오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유의 혼란이 그 증거다. 결국 대통령의 진퇴문제로 번진 최순실 게이트는 적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김지하가 특권집단으로 지목했던 오적은 거악의 그림자이자, 껍데기에 불과했다. 우리가 맞닥뜨린 진짜 적의 이름은 바로 ‘우리’다. 우리 안의 무지, 독선, 무치(無恥), 위선, 비겁함이야말로 ‘신(新)오적’이라 불러 마땅하다.

우리의 진짜 적은 바로 '우리'

대통령이 공과 사의 구분에 그토록 소홀했던 점은 무지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선의였다’는 해명을 인정하더라도,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과 역사의 무게를 망각한 무능일 뿐이다. 자유민주적 공화 가치와 국정작동 시스템에 무지한 전제적 리더십이 설 자리는 없다. 친구 딸의 사익을 위해 대기업을 압박했다는 공소장이 틀리기를 바랄 뿐이다. 청와대 참모진이나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등이 최씨의 조력자로 전락하고 만 것도 자신의 업무조차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결과다.

대통령 퇴진보다 더 걱정스런 것은 법치에 대한 몰이해가 광범위하다는 점이다. 광화문의 성난 군중은 ‘광장이 선이고, 다른 일체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경도되는 인상이다. 오보가 밝혀져도 ‘박근혜 따위를 비판하는데 진실 따위가 왜 필요한가’라는 독선이 목격된다. 대통령의 진지한 어떤 제안도 거부하는, 마치 인민재판정의 판관인 듯한 야당 지도부의 교만한 언행은 이런 독선이 에너지원이다.

‘머릿수가 정의’라는 주장은 반(反)헌법적이다. 헌법 1조에 따라 민주공화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동시에 헌법 12조는 주권재민 실현 방식으로 ‘적법절차’를 명하고 있다.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신체 생명 자유를 제약받지 않는다는 ‘듀 프로세스 오브 로(due process of law)’ 원칙으로, 마그나카르타 이후 근대 문명국에서 확립된 지고한 가치다. 우리는 1987년 6·10항쟁 이후 9차 개헌 때 명문화했다.

언론·지식층의 위선과 침묵

지식인 집단의 비겁함은 이번에도 어김없다. 침묵으로 시류에 편승할 뿐 반백년 전 시인의 벼락과 같은 목소리는 실종됐다. 통합진보당 해산이나 사드배치까지 최순실 작품이라는 인과관계가 터무니없이 부실한 주장이 대중의 호기심을 파고드는 배경이다. 검찰의 공소장마저 광장의 분노를 담아내는 데 급급한 느낌이다.

작은 이익을 탐하며 진실을 배반하는 위선도 안타깝다. 최씨는 ‘무당’쯤으로 인식되지만 행적으로 보면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2000년 무렵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여러 편력 끝에 정착한 에큐메니칼(종교통합적인)한 신앙은 종교적으로 권장된다. 그럼에도 저간의 사정에 정통한 기독교계는 최씨와의 절연에만 몰두하는 모습이다.

최고의 부끄러움은 언론의 몫이어야 한다. 의혹을 사실로 둔갑시키고, 어제의 오보를 오늘의 새 오보로 덮는 행태가 엿보인다. 적잖은 비난이 부당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일말의 사과가 없고 조롱은 과도하다. 여성 대통령의 사생활까지 억측하니 ‘진실의 대변자’인지 의구심이 만만찮다. 대통령의 진퇴보다 중요한 과제가 공화 가치를 지켜내려는 5000만명의 정신적 각성이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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