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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정동] 최창식 중구청장과의 나들이

입력 2016-11-28 16:25:26 | 수정 2016-11-28 16:25:26 | 지면정보 2016-11-29 B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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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복원 덕수궁 중명전
대한제국의 치욕 고스란히
고종이 피신했던 러시아 공사관
대부분 사라지고 주탑만 남아

붉은색 벽돌 건물의 배재학당
최초의 서양식 중등교육기관
성공회·구세군중앙회관 등
역사적 의미 담긴 건물 다양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의 주도로 1926년에 완공됐다.기사 이미지 보기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의 주도로 1926년에 완공됐다.

최창식 중구청장과의 나들이

최창식 중구청장은 정동 예찬론자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정동에 꼭 가보라고 권한다. 정동을 관할하는 중구청장이 되기 전만해도 정동은 그저 자주 가본 곳일 뿐이었다. 최 구청장은 “서울시에서 행정2부시장을 끝으로 36년간 근무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오갔던 터라 정동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며 “눈을 감고 걸어도 어디인지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동에 익숙했던 그도 2011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구청장으로 당선된 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만나 정동에 담긴 역사적 사연을 듣고 정동의 잠재적 가치를 재발견했다. 최 구청장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마련한 프로그램에 따라 구청 간부들과 함께 정동 일대를 돌았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정동이 한국 근대역사의 보고(寶庫)임을 확인한 뒤 정동을 널리 알리는 전도사가 됐다.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한 ‘정동야행’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문화재청장은 물론 각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정동을 찾을 때마다 임시 해설사가 돼 안내했다.

최 구청장과 함께 정동길을 돌아보았다. 정동길은 서울광장을 바라보는 덕수궁 대한문 옆 골목에서 시작해 경향신문사가 있는 새문안로 인근까지 이어진다. 사대문 안에 있는 지역으로 왕실과 양반들의 주거공간이었다.

을사늑약 맺어진 중명전

최 구청장은 안내에 앞서 “우리나라 최초의 시설이 많은 정동은 한국 근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강조했다. 정동의 백미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면 한가운데 분수가 있는 사거리가 등장한다. 좀 더 걸으면 왼쪽에는 1928년 일제가 경성재판소로 지은 건물의 앞면을 그대로 살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오른쪽에는 덕수궁 영역 내 건물 중 하나인 중명전이 나온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진 비운의 장소로 궁궐 내에 남아 있는 최초의 근대 건축물로 유명하다. 정동에 있는 건물 중에서 최 구청장이 가장 의미를 두는 곳이 중명전이다. 1901년 황실 도서관으로 지어지면서 덕수궁에 편입됐다. 덕수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미국 공사관이 이미 자리를 잡아 별궁처럼 이용됐다.

일제는 1905년에 군대를 동원, 중명전(옛 수옥현)을 에워싸고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기사 이미지 보기

일제는 1905년에 군대를 동원, 중명전(옛 수옥현)을 에워싸고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

1904년 덕수궁에서 큰 화재가 발생한 뒤 고종은 이곳에서 집무를 보고 외국 사절을 알현했다. 부드러운 아치와 완만한 지붕선, 우아한 화강석 난간, 적벽돌과 흑벽돌이 조화를 이룬 2층 벽돌 건물이다. 1906년 황태자(순종)와 윤비의 가례(嘉禮)가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그는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의 현장으로 대한제국의 좌절과 국권수호의 의지가 담긴 곳”이라며 “이곳에 올 때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고 밝혔다. 2010년 복원 작업이 끝나고 전시관으로 사용 중이다.

치욕의 현장 구 러시아 공사관 터

정동의 제일 높은 곳에 있었던 러시아 공사관. 6·25 전쟁때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탑만 남았다.기사 이미지 보기

정동의 제일 높은 곳에 있었던 러시아 공사관. 6·25 전쟁때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탑만 남았다.

중명전과 함께 최 구청장이 중시하는 곳이 아관파천의 현장인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예원학교와 캐나다 대사관 사잇길을 올라가면 하얀 파고라가 돋보이는 공원 위로 구 러시아 공사관 주탑(망루)이 보인다. 일제가 경복궁 건천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간 머물렀다.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의 3층 벽돌 구조로 1890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했다.

중명전도 사바찐의 작품이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16m 높이의 주탑만 보인다. 그는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됐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됐다”며 “힘 없는 나라가 얼마나 불쌍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장소”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중구청과 함께 내년부터 2021년까지 원형 그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국내 최초’ 기록 넘치는 정동길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등사한 곳인 정동제일교회도 최 구청장이 추천하는 정동의 명소다.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4월 제물포로 입국한 뒤 한옥 한 채를 구입해 배재학당을 열고 그곳에서 예배를 보면서 정동교회가 시작됐다. 배재학당 교장이기도 했던 아펜젤러 목사는 1897년 12월 그 옆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 예배당을 건립했다. 안에 들어가면 국내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을 볼 수 있다.

최 구청장은 “서재필 선생이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전위대로 만들었다”며 “3·1 운동에 전 교인이 참가하면서 일제로부터 무서운 핍박을 받았고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이필주 담임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옥고를 치렀다”고 전했다.

1916년에 지어진 배재학당 동관. 배재고가 서울 고덕동으로 이사한 뒤 역사박물관으로 쓰인다.기사 이미지 보기

1916년에 지어진 배재학당 동관. 배재고가 서울 고덕동으로 이사한 뒤 역사박물관으로 쓰인다.

정동교회 옆에는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있다. 1984년 배재고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사로 사용됐다. 붉은색 벽돌건물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중등교육기관이다. 고종 황제는 1896년 학당 설립을 재가하면서 ‘우수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길’이란 의미에서 ‘배재’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소설가 나도향, 국어학자 주시경, 시인 김소월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최 구청장은 “배재학당은 개화사상에 근거해 유교적 구습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을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로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며 “구한말에 교육구국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숭고한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갖고 용감히 항쟁했다”고 설명했다. 박물관 바로 옆 사잇길로 들어가면 배재공원이 보인다. 1896년 7월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가 탄생한 곳이고 최초의 민영 일간지인 독립신문이 발행된 터다.

이 주변에는 미국, 캐나다, 러시아, 프랑스 등 11개국 공사관이 자리 잡았다. 이 중 가장 먼저 생긴 곳이 미국 공사관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83년 미국에서 부임한 특명전권공사 푸트가 2200달러에 민계호의 한옥을 매입해 미국 공사관으로 삼았다. 1949년 미 대사관이 광화문에 들어서면서 주한 미국대사가 기거하는 대사관저로 사용됐다. 필립 하비브 대사의 뜻에 따라 1976년 한옥 양식의 대사관저를 새로 세워 ‘하비브하우스’라고 한다. 미국의 외교공관 중 주재국 전통양식을 따른 특이한 건물이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경주 포석정을 모방한 연못이 자리한 안마당을 중심으로 단층의 ‘ㅁ’자 형태로 지어졌다. 아이젠하워와 카터 전 대통령이 숙박한 곳이다.

2039년까지 복원될 선원전

1928년에 지어진 구세군중앙회관. 좌우대칭의 안정된 외관이 잘 보존돼 있다.기사 이미지 보기

1928년에 지어진 구세군중앙회관. 좌우대칭의 안정된 외관이 잘 보존돼 있다.

대사관저 옆에는 덕수궁의 옛 영역인 선원전터가 있다.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수시로 왕이 행차한 곳이다. 고종이 덕수궁을 확장하고 주변 지역을 손보면서 가장 신경을 쓴 곳이 선원전과 환구단이었다.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은 참고한다)을 실행할 장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 새문안길 쪽에서 들어오면 영성문과 크고 작은 전각들이 10여개 있었다. 일제는 고종이 승하한 뒤 어진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보냈다. 전각을 뜯어 없앤 뒤 선원 일대를 차례로 매각하고 큰 길을 내는 등 덕수궁을 훼손했다. 그 후로 들어온 것이 해인사포교원, 그 아래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였다. 해방 후 그 자리에 경기여고의 전신인 경기공립고등여학교가 들어섰다.

경기여고가 1988년 강남구 개포동으로 이전한 뒤 빈터인 이곳에 미국은 15층짜리 미국 대사관과 8층짜리 대사관직원 아파트를 건립하려고 했지만 시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문화재청은 2039년까지 선원전을 비롯해 왕과 왕후가 승하하면 시신을 모시는 흥덕전, 발인 이후 신주를 보관하는 흥복전, 배후에 있는 숲인 상림원 등을 복원할 방침이다.

최 구청장이 최근 주목하는 곳이 일제 강점기 시절 서양식 건물로 세워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다. 1922년 영국인 아더 딕슨의 설계에 따라 영국 성공회의 지원과 국내 신자의 헌금으로 착공돼 1926년 미완성인 상태로 준공됐다. 1993년 설계도 원본이 영국에 있다는 사실이 성당을 방문한 영국인에 의해 알려진 뒤 1996년 본래 모습으로 완공됐다. 그는 “성공회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 전통 건축 기법을 조화시킨 아름다운 건물”이라며 “그동안 성당 앞에 국세청 별관 건물이 있어 그곳에 성당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난해 8월 국세청 별관이 철거된 뒤 세종대로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사관저 주변에서 내리막길이 시작되면서 구세군중앙회관이 나온다. 1928년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다. 인근에 영국 공사관이 있어 성공회와 함께 이곳에 터를 잡았다.

정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덕수궁 돌담길이다.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은 헤어진다는 속설은 옛 경성지방재판소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돌담길을 걸어 법원에 들어가 이혼하고 정동사거리에서 왼편, 오른편 각자의 길로 간 모습이 그리 해석된 것으로 풀이된다.

최 구청장은 정동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정동에 오면 한국 근대문화를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며 “가족들이나 친구들, 연인들과 함께 정동에 꼭 오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최승욱 특집기획부장 swch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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