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등 야당은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대기업에 대한 공세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재벌은 피해자가 아니며 반대급부로 더 많은 것을 가져갔다”고 외치고 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 이재명 성남시장 등도 ‘대기업 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 연말 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높은데도 경제계나 기업들은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문가들은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국내 상당수 기업이 소버린, 엘리엇 등 외국 투기자본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경영권 위협하는 상법 개정안] 반 기업 정서 확산 속…"경영권 방패 빼앗으면 어떻게 기업하나"
◆SK·GS 등 경영권 방어 ‘비상’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자산 2조원 이상인 151개 상장회사(2015년 말 기준) 이사회가 외국 투기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기업 사내외 이사진을 구성할 때 대주주 의결권은 크게 제한받는 반면 국내외 펀드와 소액주주의 권한은 대폭 강화돼서다.

상법 개정안은 크게 △감사위원 분리선출제 △집중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 △전자투표제 △사외이사 규제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 상법과 시행령에 따라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을 규제 대상으로 한다.

개정안은 기업의 감사위원회 위원이 되는 이사를 다른 일반 이사와 분리해 선임하도록 했다. 대주주는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분리 선출하는 단계부터 3%로 의결권이 제한된다. 이렇게 되면 이사진 선임 과정에서 대주주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된다. 반면 지분 쪼개기(3% 이하)를 통해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할 수 있는 투기자본은 서로 연합해 기업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커진다.

상장사에서 2인 이상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들이 주식 수와 선임 이사 수를 곱한 의결권을 갖는 집중투표제도 기업 경영권을 위협하는 제도로 꼽힌다. 투기자본이나 소액주주가 힘을 합쳐 사외이사로 진출하는 길을 틀 수 있어서다.

재계에서는 다중대표소송제도 기업 경영을 뒤흔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을 대상으로 책임을 추궁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사외이사 규제 강화 항목에 있는 ‘근로자 우리사주조합 및 소액주주들의 사외이사 후보 추천 및 선출권 도입’ 조항도 논란거리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소액주주가 서로 연합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할 경우 이 중 한 명을 반드시 선임해야 하는 의무 조항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야당의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투기자본이 사내외 이사의 과반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며 “상법 개정안이 원안대로 시행되면 SK LG GS 등 지주사 체제 그룹의 경우 지주사 지분의 의결권이 모두 3%로 제한돼 경영권을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제2의 소버린 사태 우려”

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에 담긴 제도는 대부분 다른 선진국에는 없거나 일부 소수 국가에만 있는 제도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세계 주요 국가의 상법을 분석한 ‘상법 개정안 제도 국제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를 도입한 나라는 세계에 한 곳도 없다.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러시아 멕시코 칠레 등 3개국뿐이다. 한국(현행 상법상)을 비롯해 미국 일본 러시아 필리핀 대만 이탈리아 중국 등이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긴 했지만 기업들이 임의로 채택할 수 있다. 법적 의무화 대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중대표소송제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 법제화한 제도다. 김선정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대부분 나라에서 의무화돼 있지 않은 제도를 도입하자는 일부 야당 의원의 주장은 한국을 세계의 ‘상법 실험장’으로 만들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2003~2004년 SK 소버린 사태 때도 집중투표제 등이 문제가 됐다”며 “경영권 보호 장치가 미흡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과도한 자금을 투입하면 중장기 성장동력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가 위축되고 고용도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