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피델 카스트로
“모두 그렇듯 언젠가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아마도 이 자리가 나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쿠바 공산혁명가 피델 카스트로가 올 4월 전당대회에서 고별사를 한 지 7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90 평생에 52년을 권좌에 있었으니 왕족 아닌 인물로는 세계 최장기 집권 기록이다.

그는 혁명가이자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정책으로 지상낙원을 꿈꿨지만 ‘평등하게 빈곤한’ 사회주의의 낡은 시스템으로 국민을 몰아넣었다. 처음엔 파격적인 복지정책으로 호응을 얻는 듯했다. 그러나 경제가 곧 망가졌다. 사회주의식 집단농장의 생산이 급감하자 농민들은 집단 태업이나 무장봉기에 나섰다. 그는 준군사조직을 만들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소련의 붕괴와 지원 중단으로 사정은 더 나빠졌고 석유 공급이 끊기면서 전력난과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의료 천국이라지만 의사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투자 부족으로 의료품과 시설은 낙후됐다. 지금도 의사 수는 많으나 의료의 질은 낮다. 의사 월급이 40달러밖에 되지 않아 새벽청소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황이다. 택시기사 수입이 의사보다 높다. 환자들의 개인 정보 보호는커녕 의료 과실이 생겨도 어디에 신고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그는 즉흥적인 성격으로 갖가지 기행을 저질렀다. 1960년 유엔 총회에서 4시간29분간이나 연설해 혀를 내두르게 했다. 냄새 나는 작업복을 입고 와서는 미국이 제공한 호텔의 카펫과 이불을 담배로 태우고 유엔 사무총장에게 ‘미국 호텔의 불편함’을 1시간이나 따진 뒤 할렘가의 낡은 호텔로 옮긴 일화도 유명하다. 한때 군복과 시가의 강렬한 이미지를 내세우던 그는 아디다스 추리닝 차림으로 교황과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다.

가족과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다. 사탕수수 농장을 하던 어머니를 찾아가 “인민을 위해 농장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동생과 딸들은 쿠바를 탈출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23세 때 결혼했다가 몇 년 만에 이혼한 첫 부인 외에 4명의 여성과 8명의 자식을 뒀다. 그 외에도 비공식 ‘여친’이 많았으나 사생활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국민은 뿌연 시가 연기와 재즈로 마음을 달랬다. 최근 들어서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식 패스트푸드점이 생기고, 그곳 여종업원 월급이 150달러나 된다. 이런 변화의 물결은 더 빨라질 것이다. 트럼프는 ‘야만적인 독재자’라고 그를 평했다. 그러면서도 ‘자유를 향한 쿠바인들의 여행’을 돕겠다고 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