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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사이드 人터뷰] "번역은 제2의 창작?…전달에 충실해야 제대로 된 번역"

입력 2016-11-25 18:54:34 | 수정 2016-11-26 02:01:22 | 지면정보 2016-11-26 A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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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대가' 소설가 안정효 씨

국내 영문학 번역 1세대
1975년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데뷔
한 달에 한 권씩 번역 '월간지' 별명도
'좋은 글을 전해야 한다' 소명의식 중요

보람·재미·삶의 의미 찾은 번역
'번역이 원문보다 낫다'면 잘못된 번역
원문을 멋대로 '해석'하려 들면 안돼
나쁜 문장도 나쁜 문장대로 살려줘야

어릴 땐 만화가 되는 게 꿈
대학 3학년 때 영어소설 '은마는…' 집필
20년 만에 영문판 펴낸 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기사 이미지 보기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입니다. 이보다 더 싫은 말은 ‘번역이 원문보다 낫다’는 겁니다. 번역가는 전달자입니다. 함부로 번역을 멋있게 하려고 하거나, 멋대로 해석을 붙이면 안 됩니다. 외국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게 번역가의 숙명입니다. 누가 번역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번역가는 원문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국내 영문학 번역 거장이자 《하얀 전쟁(영문명 The White Badge)》 《은마는 오지 않는다(영문명 The Silver Stallion Will Never Come)》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소설가 안정효 씨(75)는 번역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번역이 원문보다 낫다면 그건 번역가의 잘못”이라며 “좋은 문장은 좋은 문장으로, 나쁜 문장은 나쁜 문장으로 옮기는 게 번역가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2일 안씨의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한 인터뷰는 철저하게 ‘번역가 안정효’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영문과 국문을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작품을 쓰는 국내 몇 안 되는 작가다. “번역가 안정효와 소설가 안정효의 자아는 완전히 다릅니다. 내 작품을 쓸 땐 창조자가 되고, 번역을 할 땐 전달자가 되죠. 철저한 전달자가 되는 건 지금도 매우 어렵습니다. 정답도 없고요.”

대학생 때부터 영어소설 써

안씨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만화가가 되길 꿈꾸던 그는 중동고 재학 시절부터 영문 소설에 빠져들었다. 서강대 영문학과에 입학했을 때 이미 영어 장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영어에 미친 천재’로 학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에게 대학 시절은 ‘번역가 안정효’의 토대를 마련해 준 고마운 시기였다. 6·25전쟁 중 미군에게 성폭행당한 뒤 이른바 ‘양공주’로 전락한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원래 그가 대학 3학년 때 쓴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약 20년 만에 미국에서 먼저 출판된 뒤 안씨가 다시 한국어판을 써서 역수입됐다.

“그때 서강대 교수가 대부분 미국에서 온 예수회 신부들이었어요. 그분들이 도움을 정말 많이 줬죠.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워낙 서슬 퍼런 시절인 데다 지금처럼 배송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아서 해외 영문 원서를 구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교수님들이 내게 영문 소설을 비롯해서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각종 서적을 대신 구해다 줬습니다. 그땐 구하기 어려웠던 타자기를 주신 분도 있었어요. ‘수업은 대충 들어도 좋으니 넌 열심히 영문 소설 읽고 네 작품을 쓰라’고 격려해줬습니다.”

안씨는 “난 한 번도 구직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며 “언제나 일자리가 나를 찾아왔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 코리아헤럴드 기자가 됐다. 군에 입대해 강원 인제 인근 최전방에서 근무하다 베트남전 파병에 자원했다. 입대한 뒤에도 기자증을 갖고 있던 그는 특파원 자격으로 베트남에 갔다. “어니 파일이란 사람이 있어요. 미국의 전설적인 종군기자죠. 이 사람은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정말 섬세하고도 감동적으로 묘사해요. 그의 글을 보면 자동으로 반전주의자가 되죠. 난 어니 파일을 동경했어요. 전쟁의 민낯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하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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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의 모습은 그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잔인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적은 기사는 코리아헤럴드에 연재됐고, 그것이 훗날 《하얀 전쟁》의 집필 원본이 됐다. “《하얀 전쟁》은 내가 썼던 연재 칼럼들을 모으고 수정해 만든 작품입니다.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에필로그를 위한 전쟁’이었는데, 미국 출판사 편집인이 ‘너무 식상하다’며 지금의 제목을 제안했죠. 영문판은 과거와 현재가 왔다 갔다 하는 구조인데, 한국어판으로는 그렇게 하면 독자들이 읽기 어려워하니까 현재와 과거 회상, 그리고 다시 현재로 시간 순서를 단순화했습니다.”

‘전업 번역가’의 새 지평 열어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코리아타임스 기자와 한국브리태니커 편집부장, 코리아타임스 편집국 문화체육부 부장을 지내며 언론계에서 경력을 쌓던 안씨는 1978년 전업 번역가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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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번역 출판한 게 번역가 데뷔였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기자보다 번역 일이 좋았어요. 좋은 원서가 너무 많은데, 이걸 제대로 번역할 사람이 없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번역으로 먹고살자는 마음을 먹었죠.”

주변에선 “미쳤다”고 했다. 당시는 번역을 직업 삼아 돈을 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평일에 낚시터에 가면 ‘형씨도 백수냐’는 소리를 수십 번도 더 들었어요. 그땐 번역이라고 하면 대부분 일본에서 먼저 번역된 걸 우리말로 재번역하는 일 아니면 한 작품을 여러 명에게 챕터별로 배분한 뒤 합치는 게 다였어요. 그래서 번역을 우습게 알았죠. 아마 번역으로만 먹고살겠다고 나선 사람은 제가 처음일 겁니다.”

안씨는 “번역한 책 중 절반 이상이 출판사에 먼저 번역하자고 제의한 것”이라며 “번역 속도가 워낙 빨라 한창때는 별명이 ‘월간지’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10명이 모여서 한 권 번역하기도 힘들어하던 시절에 난 한 달에 한 권씩 해외 명작을 번역하니까 출판사들이 난리가 난 거죠. 그래서 번역가 소리 들으며 살아갈 수 있었고요.”

“글에 대한 소명의식 있어야 평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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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는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은 글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라고 단언했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제대로 된 국문 연습도 하지 않고, 좋은 원문을 고르는 안목을 기르지도 않은 채 맡겨진 일만 하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해외에서는 문인들이 번역 작업을 많이 해요. 한국에선 그런 일이 거의 없죠. 아직도 번역을 하찮게 보는 사회적 인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그냥 번역 기계나 다름없이 사는 거죠.” 그는 2013년 《안정효의 오역사전》을 통해 기본을 지키지 않아 오역들이 판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40년 가까이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매일 오후 8시에 취침하고, 새벽 3~6시께 일어나 뒷산 산책을 다녀온 뒤 오전 내내 작업에 몰두한다. 1주일에 한 번은 꼭 낚시를 가는 소문난 낚시광이며, 휴대폰은 아예 없다.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더 생활을 단정하게 해야 합니다. 번역은 체력전이거든요. 거기서 무너지면 쓰러져 버려요.”

안씨는 “번역가의 길은 고단하지만, 그 길을 택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고 했다. “번역가란 직업, 얼마나 좋아요? 좋은 책도 볼 수 있고, 자유로이 일할 수 있고, 독자에게 인정받으면 존경도 받을 수 있잖아요. 사람이 살면서 보람과 재미, 삶의 의미를 동시에 찾을 수 있는 직업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난 참 운이 좋은 사람 같습니다. 그런 ‘운 좋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번역가가 되려면

통번역대학원·번역아카데미 등 전문과정 수료한 전문가 많아
프리랜서 대부분…처우는 열악


이젠 전문 번역가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 중 번역서가 상위권인 경우가 다반사고, 언어권마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번역가가 누구인지 서로 꼽아 보기도 하는 등 번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국내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거나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한국번역가협회의 프로그램 등 번역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외에도 대학교수들이 학술서나 문학작품을 번역 출판하기도 한다.

번역가들은 에이전시에 소속된 번역가,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번역가, 부업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형태로 활동 중이다. 대부분 처우가 열악한 게 현실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번역가는 인세가 원작자의 5~10% 수준이며, 아무리 많아도 15~20%를 넘지 못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안정효 씨는 “나는 번역을 하면 인세(책의 정가 중 일정 비율을 받는 것)로 받지 않고 매절(출판사가 저작자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면, 저작물 이용을 통해 얻는 수익을 독점하는 계약 형식)로 받는다”며 “그러나 대다수 번역가는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해 인세로 받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또 “번역가를 대우할 줄 아는 사회 풍토가 조성돼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한 게 안타깝다”며 “이런 상황에서 소명의식을 이야기한다는 게 번역자들에겐 어쩌면 사치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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