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노마드' 왕정훈, 유럽투어 신인왕
왕정훈(21·사진)이 유러피언프로골프(EPGA) 투어 올해의 신인왕을 차지했다. 지난해 안병훈(25·CJ그룹)에 이은 한국 남자 선수의 2년 연속 수상이다. 중학교 때 필리핀으로 골프 유학을 떠난 뒤 차이나투어와 아시안투어에 최연소로 데뷔해 담금질을 한 왕정훈은 올 시즌 EPGA 투어에 처음 참가해 두 번의 우승과 두 번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오랜 기간 해외를 떠돌며 선수 생활을 한 ‘골프 노마드’ 왕정훈은 신인왕 타이틀과 함께 메이저 투어 무대에 안착했다.

◆2년 연속 한국인 신인왕

왕정훈은 20일(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주메이라 골프이스테이트&리조트(파72·7675야드)에서 열린 유러피언투어 최종전 DP월드투어챔피언십(총상금 800만달러·약 94억원) 최종 4라운드에서 버디 7개, 보기 1개로 6언더파 66타를 쳤다. 최종 합계 10언더파 278타로 공동 17위에 올랐다.

왕정훈은 신인왕 경쟁자인 리 하오통(중국)을 제치고 신인왕을 차지했다. 리 하오통은 최종일 3타를 줄였으나 최종 합계 6언더파 282타로 공동 31위에 그쳤다. 이에 따라 신인왕 수상의 기준인 ‘레이스 투 두바이’ 랭킹에서 왕정훈은 16위를 기록해 리 하오통(22위)을 제쳤다.

왕정훈은 지난주 네드뱅크챌린지에서 준우승을 거둬 리 하오통으로부터 신인왕 후보 1위 자리를 되찾았다. 이번 대회의 출발은 불안했다. 첫날 3오버파 75타로 부진해 리 하오통에게 재역전을 허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2라운드에서 이븐파로 분위기를 다잡은 뒤 3, 4라운드에서 65, 66타를 몰아쳤다. 이틀간 13타를 줄이는 뒷심을 발휘한 왕정훈은 평생 한 번뿐인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 EPGA에선 지난해 안병훈에 이어 올해도 한국 선수가 신인왕에 오르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왕정훈은 지난 5월 핫산2세트로피와 아프로시아뱅크모리셔스오픈에서 2주 연속 우승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다. 세베 바예스테로스(스페인)가 기록한 EPGA 투어 사상 최연소 연승 기록을 깼다. 당시 왕정훈의 나이는 20세263일이었다. 안병훈은 최종일 4타를 줄여 최종 합계 11언더파 277타로 공동 13위에 올랐다. 이수민(21·CJ오쇼핑)은 2타를 줄였으나 최종 합계 2오버파 290타로 56위를 기록했다.

◆뇌수막염 위기 딛고 유럽에 안착

왕정훈이라는 이름 세 글자는 그동안 국내 골프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국내 무대가 아닌 해외 투어에서 프로골퍼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올 시즌 혜성처럼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부친 왕영조 씨(59)와 함께 필리핀으로 골프 유학을 떠났다. 마닐라 인근 리베라CC에서 훈련한 왕정훈은 2012년 16세의 나이에 프로 전향을 선언했다. 나이 제한이 없는 차이나투어가 데뷔 무대였다. 퀄리파잉(Q) 스쿨을 2위로 통과해 최연소 프로가 된 왕정훈은 데뷔 첫해 차이나투어 상금왕과 신인왕에 올랐다. 이듬해인 2013년 아시안투어 Q스쿨에 도전해 최연소 통과 기록을 세우며 무대를 넓혔다. 2013~2015년 매년 상금랭킹을 76위, 21위, 9위로 끌어올렸다.

왕정훈은 지난 5월 EPGA 투어 우승이란 대어를 낚았다. 그는 당초 핫산2세트로피 대회의 대기선수였다. 경기 직전 다른 선수의 기권으로 출전 기회를 잡았고 이를 우승으로 연결한 것이다.

EPGA 투어는 한국 선수들에게 쉽지 않은 무대다. 다양한 환경의 국가에서 대회가 열려 이동과 문화, 숙식 등 미국프로골프(PGA) 투어보다 적응하기 어렵다. 왕정훈은 5살 위인 캐디(고동우)와 함께 신대륙을 개척하듯 유럽을 떠돌며 승전보를 전했다. 키 180㎝에 몸무게 72㎏인 왕정훈은 장타자다. 평균 드라이버 거리가 300야드에 달한다. 여기에 정교한 쇼트게임 능력과 어린 시절부터 해외 투어에서 단련한 정신력으로 헨리크 스텐슨(스웨덴) 등 세계적인 강호들과 맞섰다.

위기도 있었다. 지난 8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뒤 한국에 돌아와 3주간 병원신세를 졌다. 유럽과 아시아, 남미를 오가는 강행군에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에 걸린 것이다. 그는 지난 9월 말부터 투어에 복귀해 다시 포인트를 쌓아 올렸고, 자칫 놓칠 뻔했던 신인왕 타이틀을 지켜냈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