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오씨' 시대는 가고 '트씨' 시대? (1)
#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4월 초 영국 런던에서 주요 20개국(G20) 회의가 열렸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奧巴馬: 오바마의 중국식 표기)가 따로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을 중국 신문들은 ‘후아오회(胡奧會)’라고 소개했다. 성(姓)인 오바마에서 첫소리 ‘아오’를 가져다 말을 만들었다.

# 2000년 미국 제43대 대통령 선거는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 간 승패를 점칠 수 없는 팽팽한 대결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는 부시의 승리였지만 개표 과정과 결과의 신뢰성을 두고 두 후보 간에 법원 판결까지 가는 반목이 일었다. 하지만 갈등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저는 지금부터 ‘나의 대통령’인 부시 당선자와 함께 이번 선거로 인한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그해 12월13일 고어는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우리 언론들은 ‘고부갈등 접고 부시호(號) 출범’이란 식으로 이를 전했다.

중국 언론이 오바마를 오(奧)씨로 표현한 것도 그렇지만 우리 언론도 말 만드는 데는 선수다. 고어와 부시는 각각 고씨, 부씨로 둔갑했다. ‘고부갈등’은 한 단계 높은 수사적 표현이다. 고어와 부시 사이를 우리네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 ‘고부(姑婦)갈등’에 빗댔다. 이런 칼랑부르(동음이의어) 기법은 글에 ‘긴장감’을 가져와 주목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외국 고유명사를 한자를 빌려 적는 방식은 우리에게도 오랜 전통이었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라는 대중가요 노랫말에 나와 유명해진 나성(羅城)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음역한 것이다. ‘두옹(杜翁)’이나 ‘사옹(沙翁)’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거의 없을 것 같다. 개화기 때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톨스토이는 두씨이고, 셰익스피어는 사씨였던 셈이다. 이 중 두옹은 당당히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 지금은 흘러간, 우리말의 뒤안길이다. 외래어표기법이 자리 잡은 요즘은 한글로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충분하다.

지난주 끝난 제45대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중국 인민망은 ‘탕나더 터랑푸(唐納德 特朗普)’의 당선 소식을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나르도 도란푸(ドナルド トランプ)’가 이겼다고 했다. 한자와 가나의 한계다. 한글은 도널드 트럼프를 그대로 읽고 적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를 ‘트씨’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