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최순실 포비아' 벗어나야 스포츠계 산다
“우리 회사에 혹시 최순실 친인척 있어요?”

얼마 전 한 스포츠산업 벤처기업 대표는 직원들을 하나씩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부 모태펀드 일부를 투자받은 게 ‘최순실 예산’ 꼬리표가 달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서다. 이 회사 K 대표는 “아무리 떳떳해도 한 번 엮여 휩쓸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스포츠계를 휩쓸고 있는 이른바 ‘최순실 포비아’다.

이 광풍이 어디까지 불씨를 실어 나를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더 큰 공포다. 최씨 모녀의 놀이터 노릇을 했다는 승마협회는 이미 쑥대밭이 됐다. 스포츠업계의 오랜 응원군이던 삼성그룹은 졸지에 압수수색을 당했다. 그러잖아도 ‘갤럭시노트7 트라우마’를 벗어나기 위해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시대를 견디던 삼성이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까지 최씨 사단의 바이러스에 오염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걸 보면 ‘나라가 거덜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시시비비는 반드시 가려야 한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국정 농단이란 암세포를 어렵더라도 조준 타격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지 못하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는 언제든 범할 수 있다. 이미 우려가 현실화하는 듯한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누군가는 지키고 키워야 할 멀쩡한 공익사업까지 싸잡혀 타격을 입고 있어서다.

청년 취업을 돕는 스포츠산업 잡페어가 그중 하나다. 현장 즉석 취업까지 적지 않았던 국내 유일의 스포츠 분야 전문 취업박람회다. 매년 이 행사에 버스를 대절해 올라오는 지방 대학이 수십 곳이다. 하지만 최순실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이유만으로 내년 정부 예산 4억원이 삭감될 처지다.

취업은 모두의 과제다.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8.5%.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10월(8.6%)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아르바이트 취업자와 입사시험 준비자 등 ‘사실상의 실업자’를 더하면 10%에 이른다. 일자리가 간절한 청년들의 직업탐색 기회까지 원천봉쇄할 순 없다.

아시안게임에 태권도 품새 종목 신설을 추진하는 계획도 ‘태권도 사업=K스포츠=최 사단’이란 등식의 ‘싸잡기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태권도 인구 1%만의 종목인 겨루기와 달리 품새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고 대회까지 출전할 수 있어 한국 태권도 글로벌 파급력의 차원을 달리할 중대과제다. 태권 한류 진흥을 위해 준비 중이던 K팝 연계 해외 태권도 공연 지원 예산도 10억원 전액이 삭감됐다.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 정식 종목 가라테를 육성하기 위해 영화 제작에 들어간 마당이다.

‘묻지마 싸잡기’의 또 다른 문제는 승부 조작 등 스포츠계의 오랜 비리를 척결하는 공공과제가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는 혼란을 틈타 척결 대상이 척결을 부르짖는 희한한 역주행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연 45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국내 스포츠산업 시장은 연평균 11% 성장하고 있다는 게 연구기관들의 분석이다. 이 과실을 누리는 70%의 주인공은 유감스럽게도 외국계 글로벌 기업들이다. 한국 스포츠산업의 10년 후퇴냐, 전진이냐의 갈림길에 모두가 서 있다.

이관우 레저스포츠산업부 차장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