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과학기술 공약은 대선 운동 기간 중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미국 과학계를 주도하는 대학교수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당원이다 보니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 캠프에 참여한 학자들이 거의 없었던 결과다. 미국 과학계는 이민자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트럼프의 당선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유아기 백신 접종은 자폐증을 불러온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펴고, 교육 분야에 진화론 반대자 기용을 검토하면서 미국 과학 정책이 심각한 혼란을 겪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과학계 안팎에서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트럼프 인수위원회에 의견을 내고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드는 이유다.
트럼프 시대에 긴장한 과학계…"한국, 무관용 특허 정책에 대비해야"
“기후변화는 중국 음모”라며 불신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과학기술 분야는 핵심 이슈에서 빠졌다. 하지만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와 네이처 등은 트럼프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과학 정책을 상당 부분 뜯어고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과학 정책 비영리기관인 사이언스디베이트오알지가 지난 9월 공개한 공화·민주 두 대선 후보의 20가지 과학 현안에 대한 답변에서 트럼프 당선자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당장 ‘기후변화’ ‘생명과학 및 보건의료’ ‘우주탐사’ 정책에서 변화가 예고된다.

트럼프 당선자는 평소 오바마 행정부의 치적인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하고 원자력을 비롯한 화석연료 사용을 확대하겠다고 밝혀 왔다. 파리기후협정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됐다.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량을 정하고 선진국의 저개발국 지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기후변화는 미국의 사업을 방해하려는 중국의 사기극”이라며 기후변화 현상 자체를 믿지 않고 있다. 지난 11일에는 기후변화 불신론자인 마이런 에벨 기업경쟁력연구소(CEI) 소장을 인수위원으로 영입했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를 비롯해 세계적인 과학자 375명은 트럼프 당선이 기후변화 문제 해결에 큰 장애 요소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빨간불 켜진 배아줄기세포 연구

생명과학 연구도 위태로워졌다. 트럼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과 식물의 유전자 연구에 대한 공식적 견해를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허용한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다시 금지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인 마이클 펜스 부통령 당선자를 비롯해 든든한 후원자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보수적인 백인 기독교계 지지를 받으며 연방정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지원을 비판해 왔다. 미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의 22%를 집행하는 미 국립보건원(NIH)에 대한 구조조정도 예상된다. 트럼프는 지난해 한 라디오 방송에서 “NIH에 대한 자금 지원이 비효율적이며 끔찍한 수준”이라는 혹평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당장 빨리 성과를 내지 못하는 기초 연구에 대한 연구비 삭감이 예상된다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트럼프의 견해는 극히 주관적이다. 그는 공화당 경선에서 자폐증이 백신 접종과 관련된다는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을 폈다. 반면 알츠하이머병 치료 연구에는 유독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트럼프는 뉴햄프셔주 선거 운동에서 자신의 부친인 프레드 트럼프가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며 “알츠하이머병은 내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우주 개발 정책도 현실성보다는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강화될 전망이다. 트럼프는 “우주 탐사를 통해 미국의 과학과 공학이 엄청난 노하우를 얻었다”며 “강력한 우주 프로그램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지구 관측과 환경 연구는 축소되고 러시아, 중국 등 경쟁국에 미국의 힘을 보여주는 유인 태양계 탐사가 힘을 얻고 있다고 분석했다.

美 이탈 과학자 유치 전략 마련해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잇따라 비공개 보고서를 내고 트럼프 시대 과학 정책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다. STEPI는 보고서에서 미 정부가 미국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요 교역국을 상대로 특허 침해에 대해 무관용 정책을 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미국이 제조 강국으로 거듭난 중국을 비롯해 스마트폰과 가전기기, 자동차 등에서 미국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에 대해 주요 분쟁 대상으로 삼을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을 떠나는 우수 외국 과학자에 대한 유치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트럼프는 과학기술 현안 20가지에 대한 답변에서 “유능한 외국 유학생이 공부가 끝난 뒤 미국을 떠나는 데는 부정적”이라면서도 “전문직 취업비자(H1B)는 미국 국적자들에게 먼저 일자리가 돌아간 뒤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방식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KISTEP는 보고서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해외 과학기술자 입지가 줄면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새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과학자들이 늘어날 전망이라며 이 기회에 해외 고급 과학기술자를 데려오는 전략을 검토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중국이 블랙홀처럼 유능한 과학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이 커지고 미군 철수에 대비해 국방 R&D에 대한 대대적 정비가 필요하다는 견해도 제시됐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