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감과 모과와 모두의 부모님 얼굴
내 고향은 예로부터 감나무가 많았다. 지금도 그곳 어떤 길의 가로수는 감나무로 이뤄져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 철이면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돌아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감을 깎아야 했다. 밤새 껍질을 깎은 감을 싸리나무 가지에 꿰어 그것을 새끼줄 사이에 고정시켜 덕대에 걸었다. 쌀을 팔아 아이들 학비를 대어주는 것은 동네 부잣집에서나 하는 일이고, 대부분 집은 다른 데서 아이들 학비를 마련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부지런히 밤을 주우러 다니고, 또 이 밭둑 저 밭둑에 심어진 감나무에서 감을 따 곶감을 만든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어서 지금도 나는 이 철이 되면 꼭 고향에 전화를 해서 감 몇 접을 청한다. 사실 감이야 집 앞 슈퍼에만 나가도 얼마든지 있다. 단감과 연시도 있지만, 껍질을 깎아 곶감을 만드는 떫은 생감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고향에 감을 청해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 손으로 곶감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 감을 만지다 보면 떠오르는 옛일 하나가 있다. 감은 한 손으로 느슨하게 주먹을 쥔 모양처럼 넓적한 것도 있고, 국기 깃봉처럼 양손을 모아 볼록하게 감싼 것처럼 뾰족한 것도 있다. 이 뾰족감을 우리는 동철감(원래는 고종시)이라고 불렀는데, 그냥 먹기엔 떫으니까 침을 들여 단감을 만들었다.

감이 흔한 동네에 살면서도 내 친구 집엔 감나무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들 학비를 위해 돈을 만들어야 하니 친구 어머니는 동네 다른 집에서 이 동철감을 사서 침을 들여 시내에 내다 팔았다. 감에 침을 들이자면 전날 오후쯤 커다란 단지 아래 볏짚을 깔고 감을 넣은 다음 소금을 푼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이불을 씌워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물의 온도 조절을 잘못하면 없는 살림에 아이들 학비라도 보태기 위해 사온 감들이 모두 무르거나 곰보가 돼 시장에 내다 팔 수 없게 된다.

일요일이던 그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침감 단지를 붙잡고 긴 한숨 끝에 눈끝을 닦던 친구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그건 그 시절 친구 어머니 한 분만의 모습이 아니라 시골에서 없는 살림에 자식만은 가르쳐보겠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시던 우리 부모님 모두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꼭 감이 아니더라도 가을은 온통 과일의 세상이다. 크든 작든 가을 과일들은 하나같이 잘 생기고 알차다. 밤과 대추는 다른 과일에 비해 알이 잘아도 몇 개 손에 들고만 있어도 속이 든든한 느낌이 든다. 그중 과일전 한구석에 울퉁불퉁 얼굴이 못생긴 모과가 놓여 있다. 옛말에도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다. 꼴뚜기는 오징어에 비해 몸집도 작고 모양도 좋지 않으며, 그렇다고 배를 따서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과 역시 빛깔과 향은 그럴듯한데, 다른 과일처럼 그 자리에서 한 입 덥석 깨물어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딱딱하기가 돌 같은 데다 맛도 시어서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그러나 다른 과일은 들고나는 것을 몰라도 모과는 과일전의 온갖 설움 속에서도 한 번 몸을 깔고 앉은 멍석에까지 제 향을 오래 남긴다.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늘 자기가 있던 자리에 오래 향을 남기는 모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이 가을 과일 생각 속에 그 깊은 뜻을 다시 깨닫는다.

이순원 < 소설가 >